책들의 우주/이론

컨트롤된 카오스 -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

지하련 2011. 2. 1. 14:04


컨트롤된 카오스 - 6점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협하는 그런 음모를 꾸민, 외계에서 밀파된 파괴자이다. 진보와 진화가 코스모스를 파괴하고 있다.
- 아비 바르부르크 (1923년 4월 21일 ‘푸에블로-인디언 지역의 그림들’이라는 강연 중에서), 279쪽에서 재인용 (밑줄은 필자가 함)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라는 부제가 붙은, 노르베르트 볼츠의 ‘컨트롤된 카오스’는 현대 사회 위로 물결치는 ICT(information - communication technology) 환경 속에서 우리 일상의 변화와 문화 예술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역자의 기대(1)대로 이 책은 읽기 쉬운 책이 아니다.

노르베르트 볼츠의 의도는 분명하다. 현대 문명의 여러 변화를 ‘카오스’로 받아들이며 이 카오스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역사의 종말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휴머니즘적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휴머니즘으로부터 작별하고 뉴미디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아비 바르부르크의 표현대로 1923년의 카오스와 1990년대 후반의 카오스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볼츠는 ‘정신은 단지 관계들-상호작용들-상황들 그리고 콘텍스트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말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미학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계속 떠오르게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여러 포스트모더니즘 미학 책들 중의 한 권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특히 잡다하게 나열된 사례들과 인용문들은 어떤 구심점을 갖고 기술되었다기 보다는 수집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볼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인류의 문명은 계속 카오스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도 코스모스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가 급변하여 갑자기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중세 세계로의 전환도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또한 몇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속에 볼츠의 책처럼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자 한 저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책이 되기에 볼츠의 이 책은 저자만의 뚜렷한 목소리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이 책의 장점으로 오해될 여러 인용과 사례들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다양한 데이터들을 활용하고 있지만, 설득력을 가지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도리어 이런 데이터들을 줄이고 자신의 주장을 보다 뚜렷하게 형상화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볼츠의 다른 책들이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그는 현재 우리 일상의 변화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이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우리의 정신이나 세계관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있다. 그는 ‘사회적 삶은 총체적 예술이 된다’(355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이란 뉴미디어의 예술이다. 그의 이러한 탐구가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1) 이 책은 비전문적인 일반 독자를 겨냥해 복잡한 문화 현상들을 풍부한 사례와 비유를 들어 마치 백과사전처럼 서술하고 있어 사전 이해가 충분치 못한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역자 머리말 중에서, 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