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뒤샹과 벤야민 그리고 소셜 미디어

지하련 2013. 10. 31. 11:48


뒤샹과 벤야민 그리고 소셜 미디어





오늘날 나타나는 것이 프로그래밍된 체험들이다. 사회적 삶은 총체 예술이 된다.
- 노르베르트 볼츠, 『컨트롤된 카오스』 중에서


변화하는 기술 환경과 창작



노년의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통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해외 토픽에 나오는 지금,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의 발달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매년 새로운 서비스와 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이를 쫓아 배우고 소비하기도 바쁘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급변하지 않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변화할 뿐이다. 눈에 보이는 여러 문화와 기술 트렌드가 이전 시대와 다르게 빠른 속도로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19세기 이래로 우리의 일상은 변한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많다. 이는 예술가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장르를 만들기도 하지만, 예술가의 창작 작업이 급변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늙은 데이비드 호크니도 그림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붓으로, 아이폰의 브러쉬로.


Three images by David Hockney - a self-portrait, a still life, and a summer dawn?made with the Brushes application on his iPhone, 2009
출처: http://www.nybooks.com/articles/archives/2009/oct/22/david-hockneys-iphone-passion/


새로운 기술에 대한 무분별한 열광은 종종 창작환경에 대한 불필요한 논의를 야기하기도 한다. 원고지로 글을 쓰고 종이책을 내던 작가들이 PC 키보드로 글을 쓰고, 온라인의 전자적 문서(하이퍼텍스트)로 펴내기 시작했을 때,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작업 환경과 결과물의 변화로 문학의 본질까지 건드리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새로운 문학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런 연구는 철지난 유행이 되었고, 이제 어떤 기대나 우려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진 때문에 미술이 죽고, 영화 때문에 소설이 죽을 거라는 호들갑스러움처럼. 그렇다면 최근의 소셜 미디어(Social Media) 열풍은 예술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소설가 박범신은 인터넷 블로그로 소설을 연재하여 출판하였고 이외수는 트위터(Twitter)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1차 출판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실시간으로 독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출판은 마치 뒷북치듯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는 것이다.

2008년 뉴욕 브룩클린 미술관에서는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 이름은 「Click! A Crowd-Curated Exhibition」이었다. 전시의 목적은 제임스 서로워키(James Surowiecki)의 책 『대중의 지혜』에서 주장하듯,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이 전문가들의 그것보다 현명하다는 것이 미술에서 가능한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전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에서 소셜 미디어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먼저 예술가들에게 페이스북(facebook), 플리커(Flickr)와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연락하였으며, 전시할 사진 작품들도 온라인으로 받았다. 그리고 웹사이트에 사진 작품들을 전시하였고, 일반인들로 하여금 전시 작품들을 평가하도록 하였다. 모든 전시 활동들이 먼저 온라인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작품들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평가하도록 하였으며, 그 평가를 바탕으로 실제 미술관 전시가 이루어졌다. 즉 ICT의 발달로 인해 예술 창작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창작 이후의 어떤 과정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뒤샹과 벤야민의 소망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를 「샘」이라 이름붙이고 미술관에 전시했을 때, 그 의도는 분명했다. 당신들,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면서 ‘미술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바,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누구나가 원하기만 한다면 미술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기존 예술 작품이 가지던 종교적, 정치적 아우라가 기술 복제를 통해 사라질 것이고 예술은 대중의 것이 될 것이며,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파시즘에 싸울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을 주도할 예술 장르로 사진과 영화를 주목했다. 그렇다면 마르셀 뒤샹의 의도는 성공하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은 이루어진 것일까?

뒤샹의 「샘」 원작(?)은 한 번 분실된 후, 새 변기에다 「샘」이라고 적는 해프닝이 있었다. 뒤샹의 의도와는 반대로 뒤샹만이 상점에서 파는 변기를 「샘」이라는 현대 미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뒤샹의 도발적인 ‘레디메이드’는 20세기 이후의 미술을 개념 미술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발터 벤야민의 소망, ‘아우라’는 사라지고 예술의 정치화를 통해 그가 바라던 어떤 사회는 결국 오지 않았다. 도리어 뛰어난 예술가가 되려면 먼저 시장과 정치를 알아야하고, 예술 권력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전문가, 아마추어, 일반 대중의 거리를 더욱 멀어졌다. 20세기 중후반까지 현대 예술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소셜미디어가 만들어가는 예술적 일상

제롬(Jean-Leon Gerome)이나 부게로(William-Adolphe Bouguereau)같은 아카데미 화가들이 보기에 모네(Claude Monet), 피사로(Camille Pissarro)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마치 형편없는 아마추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마추어들은 현대 미술(Modern Art)을 만들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연극 무대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의 서사극이론은 관객이 무대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개방된 무대를 지향하기 위한 기술이었다. 얼마 전 끝난 국립현대미술관의 「누가 미술관을 두려워하랴 - 박기원」전은 현대 미술이 어떻게 일반 대중의 참여를 바라는가를 드러내는 전시였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예술의 시대는 가고 평등과 개방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마치 뒤샹과 벤야민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소셜미디어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 아닐까. 모두에게 개방되고 모두가 참여하며 공유하는 어떤 것. 이미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운영하며 대중들과 대화하고 있다. 미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블로그에 올려 공유하고, 온라인을 통해 판매까지 하고 있다. 미국시인아카데미에서는 ‘Poem Flow'라는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휴대폰에서 시를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런 어플리케이션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이미 많은 갤러리와 미술관들은 웹사이트뿐만 아니라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로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고 있으며, 미국의 인디아나폴리스 미술관은 아예 소셜미디어 기반의 웹사이트인 ’ArtBabble'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을 정도이다.

소셜미디어의 개방성으로 인해, 일반 개인도 이러한 활동이 가능해졌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직접 그린 그림, 그리고 자작시나 소설을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하고 공유하며,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해졌다. 즉 누구나 원하기만 한다면, 자신의 작품을 온라인으로 전시하고 평가받는 일이 가능해졌다. 19세기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전시장을 가지기 위해 고분 분투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제 예술가가 되고 싶다면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면 된다.

소셜미디어의 힘은 전문 예술가와 일반 대중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있다. 이는 예술 창작의 기반을 흔드는 일이 아니라, 예술 유통의 기반을 흔들어, 예술가의 존재를 새로 정의내리고 있는 셈이다. 전문 화가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해야 된다든지,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 등단을 해야만 한다는 기존 공식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기존 예술 권력의 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중과 소통하며 대중과 호흡하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소셜미디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하는 것이 현대 예술가의 중요한 활동이 된 셈이다.

2006년 타임지는 ‘세계의 역사는 위대한 인물들의 전기일 뿐’이라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사상이 현대에서는 더 이상의 호소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하며, 올해의 인물로 ‘당신(YOU)'으로 선정했다. 뒤샹이 원했고 벤야민이 의도했던 바, 모든 이들이 예술가가 되고 예술의 유통이 무한 복제와 공유가 가능한 공간이 소셜미디어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http://www.artbabble.org/ 



* 이 글은 인천문화재단에서 발간하는 저널인 '플랫폼'에 실렸던 글입니다. 2010년 봄에 실렸던 글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소셜미디어와 관련된 책 여러 권을 구입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아 씁쓸했던 기억이 나네요.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쓰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제목은 저널에 실린 제목대로 올렸습니다. 원래 제가 적었던 제목이 있었으나, 편집자가 선택한 제목이 좋습니다. 책이든 저널이든 편집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