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신기관, 프랜시스 베이컨

지하련 2019. 2. 2. 08:27




신기관 Novum Organum 

프랜시스 베이컨(지음), 진석용(옮김), 한길사 



근대(Modern)를 여는 대표적인 고전이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평이했다. 도리어 아리스토텔레스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베이컨의 문장들이 더 흥미로웠다. 지금 해석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당시(1620)에 받아들여졌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르든가, 아니면 스콜라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본 아리스토텔레스였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은 전체적으로 연역법적 태도를 공격하고 귀납법적 태도를 옹호한다. 어쩌면 전체주의 시대를 겪었던 칼 포퍼가 시대를 거듭하며 다른 모습을 재현되는 플라톤주의를 공격하듯(<<열린 사회와 그 적들>>), 베이컨은 17세기 초반 서구 문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중세주의(연역법, 스콜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기 위해 이 책, <<신기관 -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을 쓴 것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진 책임을 알 수 있었다. 


17세기부터를 근대라고 부르기로 한다면, 베이컨은 근대의 문을 연 사람이고, 근대 정신의 특징을 과학적 접근 방법이라고 한다면 귀납적 관찰 방법을 주창한 <<신기관>>은 근대 과학 정신의 초석을 담은 저작이다. <<신기관>>이라는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인 <<기관 Organum>>에 대한 대항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 13쪽 


'참된 귀납법'을 채택하기만 하면 저절로 자연의 진리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깊이 뿌리박혀 있는 편견, 즉 '우상(idola)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을 사로 잡고 있는 우상에는 네 종류가 있다. 종족의 우상(Idola Tribus), 동굴의 우상(Idola Specus), 시장의 우상(Idola Fori), 및 극장의 우상(Idola Theatri)이 바로 그것이다. - 22쪽 


'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그 자체에, 인간이라는 종족 그 자체에 뿌리박오 있는 우상이다. (... ...) 베이컨은 종족의 우상에 사로잡힌 인간의 지성을 "표면이 고르지 못한 거울"에 비유했는데, 이런 거울은 "사물을 그 본모습대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서 나오는 반사광선을 왜곡하고 굴절시켜 보여준다." - 22쪽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우상이다. 즉 개인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오류와는 달리) '자연의 빛'(light of nature)을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동굴' 같은 것을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 22쪽


'시장의 우상'은 인간 상호 간의 교류와 접촉에서 생기는 우상이다. (... ...) 잘못된 언어는 지성에 폭력을 가하고, 모든 것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인간으로 하여금 공허한 논쟁이나 일삼게 하고, 수없는 오류를 범하게 한다. - 23쪽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철학의 다양한 학설과 그릇된 증명 방법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생기게 된 우상이다. (... ...) 이 철학 체계들은 "대체로 적은 것에서 많은 것을 이끌어내거나, 많은 것에서 극히 적은 것만을 이끌어내 그들 철학의 토대를 세우기 때문에 실험과 자연사의 기초가 박약하다." 이러한 엉터리 철학은 세 종류가 있는데, 궤변적인 것(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철학자들)과 경험적인 것(연금술사들과 길버트)과 미신적인 것(피타고라스 학파, 플라톤학파, 파라셀수스 학파) 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우상들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연히 얻은 경험이 아니라) 계획된 실험을 통해 얻은 경험에서 (중간 수준의) 공리를 이끌어내고 이 공리에서 다시 새로운 실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 23쪽 


실제 책을 인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진석용 교수의 서문만 읽어도 이 책을 알 수 있다. 다소 중언부언하는 투로 전개되어 책 자체의 밀도는 떨어진다. 


베이컨의 <<신기관>>은 크게 1권과 2권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1권에서는 귀납법적 태도와 4가지 우상에 대한 공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2권에서는 그가 직접 귀납법적 태도로 연구한 사례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솔직히 2권은 읽지 않아도 무방할 정도로 난삽하다.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책에 기술된 그의 실험, 분류, 정의 등은 엉성하기만 하다. 그가 집요하게 공격한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비논리적으로 보일 정도다. 어쩌면 귀납법적 태도도 비논리적으로 여겨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귀납법 보다는 연역법적 태도가 호소력이 있고 공격적이다. 이 점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연역법에 젖어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이 대체로 연역법적 태도, 철학, 방법론에서 기인한 것이라면(포퍼리안들의 주장), 이 책은 연역법적 태도를 공격한 최초의 책들 중 한 권이다.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은 근대를 여는 고전이 될 수 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진석용 교수의 서문만 읽어도 프랜시스 베이컨과 <<신기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뜻) 



(* 위 인용 쪽수는 아래 책과 다르다. 2001년도에 출간된 구간을 읽었다.) 


신기관 - 8점
프랜시스 베이컨 지음, 진석용 옮김/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