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이런 봄날이었을까

지하련 2019. 5. 11. 12:40



이런 봄날이었을까, 가벼운 흰 빛으로 둘러싸인 꽃가루가 거리마다 마을마다 흩날리던. 내가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을 읽고 아파했던 날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결혼하기 전이었고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지금도 있으려나, 그래서 봄이면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은 금기). 그리고 그 환상으로 사랑을 잃어버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으며(이건 지금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해선 더더욱 까막눈이었다(지금도 그런 듯). 그 때 그 시절, 나는 <<고통>>을 읽었다. 기묘하고 아름답고 슬펐다. 알베르 까뮈가 격찬했고 조용히 번역 출판되었다가 거의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 소설이었다. 몇 해 전 문학동네에서 재출간되었다. 나만 알고 있었으면 좋았을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기억을 더듬을 생각에 블로그 리뷰를 찾아보니, 없다. 분명 쓴 기억이 있는데. 그러다가 찾은 건 헨리에테 포겔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게 보낸 짧은 편지.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클라이스트는 1811년 11월 22일, 권총을 들고 사랑하던, 그러나 유부녀이자 자궁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던 헨리에테 포겔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포겔의 주검 앞에 서서 클라이스트는 자신의 사랑을 쏜 그 권총으로 자신의 짧았던 생(生)마저도 끝낸다. 2016년 우리 곁을 떠난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그의 첫번째 독서노트 모음집인 <<흡혈귀의 비상>> 속에서 헨리에테 포겔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옮겨놓는다. 흐려져가는 내 기억 속에 저런 연시(戀詩)를 받은 적도 없고 저런 연시를 쓴 적도 없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투르니에는 저 글을 불어로 옮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고통>>도, <<흡혈귀의 비상>>도 서재 어디에 있는지, 어쩌면 버렸는지도 모르는데, 봄바람은 불고, 내 사랑도 그대 사랑도 길을 잃고, 청춘은 이제 저 먼 뒷길로 총총 사라져가는데, 아름답고 따스한 봄날은 참도 무심히 이어진다. 




헨리에테 포겔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게 


베를린, 1811년 11월 


나의 앙리, 나의 아름다운 이, 나의 히아신스 꽃밭, 나의 오로라, 나의 석양, 나의 평화로운 태양, 나의 공기의 하프, 나의 이슬, 나의 무지개, 내 무릎 위의 갓난아기, 내 소중한 사람, 고통 속의 나의 기쁨, 나의 재생, 나의 자유, 나의 노예, 나의 안식일, 나의 황금 성배, 나의 대기, 나의 열기, 나의 생각, 내가 기다리던 내세와 현세, 나의 사랑하는 죄, 내 두 눈의 위안, 나의 가장 소중한 근심, 나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 나의 자부, 나의 보호자, 나의 양심, 나의 숲, 나의 영광, 나의 투구 나의 칼, 나의 용기, 나의 오른손, 나의 크리스탈, 나의 생명의 원천, 나의 수양버들, 나의 주인 영주님, 나의 희망, 그리고 나의 굳은 결심, 나의 사랑하는 성좌, 나의 어린 아양꾼, 나의 흔들리지 않는 성채, 나의 행복, 나의 죽음, 나의 도깨비불, 나의 고독, 나의 아름다운 배, 나의 골짜기, 나의 보상, 나의 베르테르, 나의 레테, 나의 요람, 나의 향 그리고 나의 몰약, 나의 목소리, 나의 판관, 나의 다정한 몽상가, 나의 노스텔지어, 나의 영혼, 나의 황금거울, 나의 루비, 나의 목신의 피리, 나의 가시관 , 나의 수많은 골짜기들, 나의 스승, 나의 제자, 내 생각 속에 있는 이 모든 것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헨리에테


추신 - 나의 정오의 그늘, 나의 사막의 오아시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종교, 나의 내면의 음악, 나의 가엾은 병든 앙리, 나의 부드럽고 하얀 유월절의 어린 양, 나의 천국의 문.




Grave of Kleist and Henriette Vogel at Kleiner Wannsee after renovation in 2011

https://en.wikipedia.org/wiki/Heinrich_von_Kle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