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독재라고 불리는 이 나라

지하련 2019. 5. 26. 14:15


우연히 받아보기 시작해 이젠 끊을까 생각하고 있는 신문, 중앙일보에 <"독재타도"라는 말>이라는 칼럼이 실렸다. 단국대 영문과 오민석 교수의 칼럼이다. 종종 뛰어난 산문으로 가끔 읽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이번 칼럼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더라. 


"독재타도"라는 말도 참 오랜만에 들어본다. 이 말이 진정성을 가질려면 이 말을 하는 주체가 이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체포, 구금, 고문, 죽음 등의 공포를 경험할 수도 있는 환경이 전제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 말엔 그런 처절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하여 이 말은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고난의 삶들을 횐기한다. 그러나 지금의 누구가 이런 말을 해도 잡혀갈 일이 없다.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울려퍼지는 이 말이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개국 이래 최악의 독재 정권들을 줄줄이 생산했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만든 대통령을 거의 예외 없이 감옥으로 보낸 정당이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희한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잇다. 며칠 전 거대 야당의 원내 대표는 현직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달창"(달빛 창년단, 일베들의 용어)이라 불러 물의를 일으켰다. 최대 야당의 근 70명에 가까운 국회의원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의해 감옥에 간 전직 대통령의 형집행정지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현 정권을 나치에, 그리고 법죄 혐의를 가진 전직 대통령의 수감 상황을 아우슈비츠에 비유했다. 


그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다. 정치적 이유로 피박 받거나 가택 연금을 당하거나 고문당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똑같은 단어로 떠든다. 비상식적이라서 무시하기엔, 너무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고 언론에 나오고 인터넷공간에 널리 퍼져나간다. 세상이 좋아진 것인지, 나빠진 것인지, 가끔 헷갈릴 때가 있는데, 그건 무신경하고 일관적이지 못한 대중들 때문일까.  


모든 정치는 그 속성상 권력을 지향하지만, 그 욕망조차도 공적 정의의 언어로 포장한다. '정의롭지 못한 정치는 가짜'라는 정언 명령이 허튼 욕망을 수치(羞恥)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아는 정치 역학이 강동될 때, 정치의 기본기가 마련된다. 저 깊숙한 내면에 감추어진 사적 욕망이 공공성이라는 초자아의 검열 앞에 고개를 숙일 때, 정치는 최소한의 윤리와 양심을 담보하게 된다. (...)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한국 정치는 거의 야만의 수준에 떨어져 있다. 


정제되지 않은 비속어가 남발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철학이나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이 숨겨져 있지 않은 언어가 아니라, 오직 자기 무리들의 이득만을 위해 말하고 움직이는 정치 집단에 대해 기대 이상의 지지율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나라는 뭔가 심각하게 꼬여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적어도 이 나라 10명 중의 2-3명은 비상식적이며 무례하고 이 나라의 미래 따윈 아무 관심 없는 이들이거나, 상당히 삐딱하거나.  


정치 언어의 가장 기본적인 규칙은 사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다. 성숙한 언어는 진리와 정의의 약호로 악과 이기심과 부도덕을 검열한다. 


하지만 이건 이상주의적이다. 이 칼럼은 이상적인 기조 위에서 현실적인 이해를 구한다. 그래서,


언어가 현실을 만든다. 가짜 언어가 가짜 신념을 만든다. (...) 힘을 가진 소수 공인들의 나쁜 문장들이 나쁜 연결과 결속으로 나쁜 현실을 만든다.


어쩌면 나쁜 현실은 이미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리고 이 칼럼이 올라와 있는 웹페이지 댓글을 보면서, 나쁜 현실이 지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나라의 어느 한 부분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