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지하련 2019. 6. 4. 19:38



베네치아의 종소리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 문학동네 




자주 수필집을 찾게 된다. 심각한 소설이나 엄숙한 인문학 책 대신 가볍게 읽을 수 있으면서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크게 상처 입지 않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글을.


스가 아쓰코. 우연히 도서관 서가를 살펴보다 꺼낸 산문집의 저자이다. 역자 송태욱은 잘 아는 이름. 십수년 전 가라타니 고진의 책 여러 권을 무난하게 번역한 이니, 믿을 만하다. 어쩌면 역자 때문에 스가 아쓰코의 책을 집어든 것일지 모른다. 


스가 아쓰코. 1929년에서 1998년을 살다 죽은, 일본의 번역가이자 수필가. 예순 하나에 쓴 에세이로 일본 문단 최고의 에세이스트로 유명세를 얻었다. 


<<베네치아의 종소리>>에는 총 12편의 글이, 시간의 순서나, 주제나 소재의 질서와 무관하게 배열되어 있다. 아쓰코의 이탈리아 생활, 파리, 일본에서의 일들을 오가며 펼쳐진다. 단순하고 평이한 문장이지만, 일상의 작은 풍경 하나도 놓치지 않는 디테일이 좋다.


가즈가 죽고 얼마 후 전쟁이 끝났다. 해군에서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불태웠다는 얘기가 들리고, 입대했던 아버지의 두 동생도 돌아온 뒤, 8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오노에 들렸다. 히메지에서 미군이 오니 여자아이들은 몸을 피하라는 소문이 오노에 전해지자 러일전쟁에서 부상을 당했던 큰 이모부는 말했다. 군대라는 곳에 가면 확실히 사람이 변하지. 하지만 미군이라고 그렇게 야만스러운 놈만 모여 있진 않을 꺼야. 그 한마디에 안심한 듯 큰 이모와 어머니에게서는 도망가자는 이야기가 쑥 들어갔다. (47쪽 ~ 48쪽) 


위 문장을 읽으면서 문득 우리의 과거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가 읽은 글들 중 식민지 시대의 일상을 이야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큼 상처이고 언급하기 어려운 주제/소재일 테니. 아마 스가 아쓰코와 비슷한 세대라면, 그 때 학교를 다녔다면, 한글보다는 일본어가 더 능숙했을 것이다. 소설가 김동인도 한글보다 일본어를 더 잘 했으니까. 한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20세기 초 소설가들이 일본어의 틀이나 한자를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국어 선생들은 가르쳐주지 않는 것일까(아마 그들도 잘 모르겠지만). 어느 칼럼에선가 한국 전쟁 이후 중고등학교나 대학 강단에 선 이들의 상당수가 한글보다는 일본어가 더 편했던 사람들이라는 언급을 읽은 바 있다(그러니 지식의 측면에서 일제 식민지를 벗어나기란 아직도 힘든 것이다).  


아픈 모습이다. 하지만 스가 아쓰코는 이 시기를 차분하게 잘 적고 있다. 이후 유학 생활이나 가족들의 이야기들도. 아픈 일들이 있기도 했으나,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이다. 마치 아래 문장처럼. 


시든 풀색의 개 한 마리가 귀를 쫑긋 세운 채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는 조그만 건널목을 지나, 깊은 협곡에 놓인 철교를 건너고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그 역이 나왔다. (237쪽)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고 잊혀진다. 그 즈음 스가 아쓰코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수필집으로 묶어낸다. 그래서 감정의 동요도 없고 살짝 떨어진 창가에서 바라보는 냇물 같다고 할까. 냇가 위로 빛을 잃어가는 녹갈색의 나무 가지들이 흔들거리고 가벼운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치고,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새로운 일보다 기억이 나는 일이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실은 나도 그런가, 자주 회한과 후회에 잠긴다. 그러지 말아야지 늘 다짐하건만. 언제나 새로운 사람이나 장소를 희망하지만, 늘 있는 곳은 내가 아는, 익숙하고 낯익은 사람이거나 장소이더라. 





스가 아쓰코와 그녀의 남편 주세페 리카



베네치아의 종소리 - 8점
스가 아쓰코 지음, 송태욱 옮김/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