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음반들, 그리고 우리들의 기다림

지하련 2019. 6. 30. 16:15



몇 번의 이사,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생의 변화 앞에서 음반들은 그 특유의 친화력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한 때 자신들의 소리를 보여줄 도구들마저 없었을 때, 아마 그들은 나를 원망했을 것이다. 


주중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전, 음반들 한 무더기를 꺼내 한 번 정렬해 보았다. 다들 오래된 음반들이다. 심지어 존 케이지(John Cage)를 연주한 음반도 눈에 보이지만, 몇 번 들었던가, 언제 마지막 들었던가, 그런 기억마저도 없다.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아줄 이를 만났을 때에만 그 빛을 발한다. 그건 그녀도, 그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대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알리고 드러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구차하고 쓸쓸한 일인가를,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이라면 알 것이니.....


최근 몇 번의 술자리로, 나는 내 스스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입혔다. 까닭없이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으며, 한없이 빈약해진 내 언어들을 마주하고도 그 어떤 분노도, 절망도, 회한도 느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 나이가 들었다. 그것이 슬슬 하나 둘 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언어마저도, 사랑마저도 포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숨 죽이고 자신들의 음악을 들어줄 때 언제인지도 모른 채 끝없이 기다리는 저 음반들처럼, 나는 그 언제를 한없이 미루게 될 것이다. 미루면서 계속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젠 세상 탓도 하지 않을 테고, 내 탓도 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희망으로, 꿈으로, 사랑으로 날 옥죄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더 이상. 그렇게 나는 천천히 어두운 생의 골목길 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혹시 이 글을 읽게 될 당신이, <<Officium>>이나 <<A Day>>는 구할 수 있다면, 구해서 들으면 좋을 것이다. 전자는 컴템플러리 재즈가 어떻게 클래식의 영역을 뒤흔드는가를 깨닫게 해줄 것이며, 후자는 아, 재즈!라고 외치며 산뜻하게 당신의 몸을 일으켜 세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