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

지하련 2019. 9. 8. 12:08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서경식(지음), 한승동(옮김), 나무연필, 2017년 



'일장기'라고 불리는 히노마루와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인 기미가요는 원래 일본의 공식국기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교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각종 공식 행사에 쓰였고 1999년 8월 9일 이들이 일본의 국기와 국가로 법제화된다. (14쪽, 각주에서 인용) 


일본의 우경화를 먼 나라 이야기라 여겼던 걸까, 아니면 꽤 많은 일본 소설들과 지식인들의 책들을 읽었다고, 그리고 영화나 최근의 일본 여행으로 정치외교 분야의 갈등을 우리가 겪는 일상과는 다른 층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키하바라 역 앞에서 연설하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에워싸고 일장기를 휘날리며 환호하던 '시민'들이 반중, 협한, 재일 한국인 배척 구호를 외쳤습니다. 1930년대의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도시의 거리에서, 극우 배외주의 세력의 폭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57쪽) 


2012년 12월 일본 총선거 때의 선거 유세 풍경을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아베 이후 일본의 우경화는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2019년의 한일갈등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가 일본의 우경화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나, 나는 과연 일본이라는 나라를, 일본 사람들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고른 책들 중 한 권이다. 


이 책은 서경식 교수가 일본의 우경화, 그리고 한일 관계에 대해 여기저기 기고한 글들을 모아낸 것이다. 따라서 상당히 시사적이며 일본의 우경화라든가 일본의 리버럴한 지식인들이 어떻게 목소리를 잃어버렸는가를, 그리고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의견도 함께 읽을 수 있다. 체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진 않지만, 일본의 현재를 알기엔 충분하다. 


"지금 현재 제국주의자들을 이토록 제멋대로 날뛰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사이드는 "강력하게 조직되고, 많은 사람들을 확실하게 동원할 수 있는 저항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와 함께 "지식계급 전반의 실패"를 들었다. "중요한 목표goal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중요한 목표란 에메 세제르Aime-Fernand Cesaire가 말했듯이 자유오 해방과 계몽을 추구하는 모든 민족들이 모이는 승리의 모입입니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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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에서 종종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쓰여 있습니다만,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핵심적 주장은 '위안부' 연행에 책임이 있는 주체는 '업자'이지 '군'이 아니며, '군'의 법적인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과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된 지 오래된 주장이므로, 내가 여기서 지붕 위에 또 지붕을 얹는 군더더기를 만드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지요. 이 주장은 실제로 오랜 세월에 걸쳐 거듭돼온 일본 정부의 주장과 보기 좋게 일치합니다. '위안부' 문제가 크게 사회화된 것은 1990년 국회에서 일본 정부의 한 위원이 '위안부'는 '민간 업차들이 데려갔다'고 답변해 피해자들의 격분을 산 사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94쪽) 



재일조선인에게 '고향'과 '국가'는 일치하지 않으며, '국가'는 늘 자신의 경험 바깥에 있고 즉자적인 애착의 대상일 수 없다. (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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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언급된 몇 권의 책들(내가 읽으려고 하는 책들)  

시라이 사토시, <<영속패전론>> 

이미 70년 전에 패전국이 되었지만 여전히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전승국 미국에 복종하는 일본 지배층의 모순된 이념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주목받는 젊은 사회학자인 저자 시라이 사토시는 이 책에서 그들 이념의 특징을 ‘영속패전’으로 규정하고, 국수주의에 함몰된 일본 보수층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출판사 책 소개 중에서) 


헨미 요, <<1★9★3★7>> (미번역)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8705.html  

대학살의 여진이 이어지고 피냄새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홋타와 다케다의 문학이 열어가려 했던 것은 타자의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자율적인 윤리적 갱생을 꾀하려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걷고자 했던 사람들은 전후 한때 소수이긴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지금은 잡초에 뒤덮여 지도에서도 사라지려 하고 있는 그 길을 헨미 요라는 작가가 걸어가려 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아직 어렸을 때 술취한 아버지가 갑자기 얘기한 적이 있다. 조용한 고백은 아니었다. 참회도 아니었다. 야만적인 노기를 띤, 감출 수 없는, 감출 기색도 없는 얘기였다. 그 기억은 아직도 선연하다. ‘조센진(조선인)은 안 돼. 저놈들은 손으로 때려선 안 돼. 슬리퍼로 두들겨패야 돼. …’ 귀를 의심했다. 미친(발광)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홋타 요시에도 인용되어 찾아본다. 이미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0410656&CMPT_CD=MSEB17#cb 


다만 이러한 이들의 목소리가 일본 전반을 물들이지 못하는 점이다. 도리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위축되었다. 한국에 소개되는 일본인들과 실제 일본에서 발언권을 가진 이들은 전혀 다르겠지. 서경식 교수도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65년 넘게 살았지만 최근 몇 년 내가 ‘일본과 일본인’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강해졌다.'라고 생각할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