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

지하련 2021. 5. 8. 13:20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장정일(지음), 마티

 

1.
어떤 경향성이나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기 보다는 그냥 손 가는 대로 들고 읽는 듯하다. 그래서 책 자체의 완성도나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씌어진 글도, 그렇게 만든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은 온전히 작가 장정일의 태도나 문장 자체가 될 것이다.

 

가끔 우연히 읽게 되는 장정일의 짧은 글들은 상당히 좋다. 그렇다고 해서 꾸준히 찾아 읽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 장정일의 첫 등장을 기억하는 나로선, 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여준 변화가 한 편으로 보기 좋다.

 

그러나 가끔 소년 장정일의 모습을 떠올리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에겐 반항적이며 이단적이고 끊임없이 외부 세계를 거부하는 자아를 가진 예술가의, 변하지 않는 중년이나 노년을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 옆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는 뒤로 하고)

 

2.
글쓰기의 가짓수는 무척 많고, 교양이란 굉장히 폭이 넓은 세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글쓰기 하면 곧바로 시나 소설을 떠올리고, 그걸 읽는 게 교양의 다인 양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 고작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가망이 없다. (168쪽)

 

글쓰기와 교양의 관점에서 보자면, 매번 자기계발서만 읽는 사람과 소설만 읽는 사람은 동일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글을 잘 쓴다고 하면 다들 시인이나 소설가를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장정일의 저 지적은 옳은 말이지만, 아직도 그런 지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인식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해 진다.

 

3. 
많은 책이 소개되는 이 산문집에서 나도 몇 권의 책을 메모했다. 아마 몇 권을 빌려 읽던가 사서 읽을 것이다. 몇 개의 기억해둘 만한 문장을 옮겨 적는다.

 

유니스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자신의 문맹이 ‘부끄러워’ 한 가족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흔히 문맹이라면 방금 말한 것처럼,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상태만을 떠올리는데, 작가에 따르면 문맹은 그 당사자의 ‘상상력과 감정’마저 문맹의 상태를 만든다. “문맹은 그녀의 연민을 고갈시키고 상상력을 퇴보시켰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린다는 것은 이제 그녀로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맹은 인간에게 필요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빼앗고 인간관계와 소통을 기피하게 만든다. (107쪽)

 

불교를 융성시키고자 했던 덴무 천황은 살생 금지라는 불교 교의를 기반으로 살생 금지 및 육고기 식용금지령을 내렸다. 그게 675년이었으니, 그 때부터 육식 해금이 선포된 1872년까지 일본인은 근 1200년 동안이나 육식을 먹지 못했다. 그 기간동안 수, 당에서 전해진 우유나 유제품마저 사라졌다. 물론 그 조치는 사육동물인 가축을 대상으로 했으므로 야생동물은 제외되었다. (130쪽)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추첨을 통해 집정관을 지명하는 것은 민주적인 것이고, 선거에 의한 것은 과두적이라는 것이다. 재산 자격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민주적이고, 그에 대한 제한이 있는 것은 과두적인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 암베드가르는 부모의 교육열과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어 미국과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다.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27년 3월, 봄베이의 공공 저수지를 개방시키기 위해 만 여명의 불가촉천민과 함께 행진했던 일이다. 인도 현대사에서 이 사건은 간디가 반영투쟁의 일환으로 강행했던 1930년의 ‘소금행진’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 사건 이후 암베르카르는 공개적이로 <마누법전>을 불태우고 저수지에서 힌두사원으로 진로를 바꾸어 불가촉천민의 사원 출입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 (96쪽)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8점
장정일 지음/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