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숲 속에서의 책 읽기

지하련 2021. 9. 1. 14:29

 

제목이야 저렇게 달았지만, 여유로운 풍경이라기 보다는 도망쳐 나온 것이다. 소년원 출신 시인 장정일이 그의 첫 시집에서 '도망 중'이라는 글귀를 사용했을 때, 절반만 공감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이제 그도 이제 환갑이 되었고 나도 쉰이 되어간다. 돌이켜보니, 늙었다는 기분에 잠긴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젊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종종, 자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저 침묵의 우주가 가진 절망스러운 무한함에 대해서도. 

 

몇 명의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그 사람들을 내보내고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데, 엄청나게 힘에 부친다. 계속 구인공고를 올리지만, 대졸 신입도 지원하지 않는다. 회사는 매년 성장해 이제 직원 수만 150명 가까이 되는 디지털 에이전시가 되었지만,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나도 힘들다. (혹시라도 디지털 에이전시에서 일을 하고 싶다면 연락을 ;;;) 

 

최근 빠진 작가는 세스 노터봄이다. 예술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으로 그의 글에는 늘 예술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글의 공간적 배경이 유럽이거나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쓰고 싶어도, 그럴 정신적, 물질적 여유가 없다. 

 

여유를 가지고자 일을 하는데, 일은 내 여유를 앗아간다. 이젠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나를 혹사시킨다. 그러니 도망치고 싶고, 한정적, 혹은 조건있는 도망을 주말마다 감행한다. 한 손엔 책 한 권, 한 손엔 비워져가는 술병 하나. 

 

숲은 부드럽게 깊었고 고요하기만 한 소음의 끝자락을 나에게 선사했다. 뜨거운 여름날의 햇살은 나무잎에 부서져 싸라기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뜨거웠던 2021년의 여름이 지나고 있다. 내 마음에도 이제 청춘의 빛깔이 희미해지고 내 사랑의 열정도 이제 저문다. 

 

도망치다, 도망치다, 이 도망의 끝은 아마 저 우주의 무한한 침묵 속이 될 것이다. 그래, 나는 내가 다시 저 우주로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저 끝없는 우주와 한 몸이 될 때, 내가 가벼운 바람에도 흩날리는 뼈가루가 될 때, 내 도망은 그 소란스러웠던 페이지를 닫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