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도망가듯, 연천 호로고루

지하련 2021. 10. 26. 13:20

 

호로고루(瓠蘆古壘)은 한자 의미 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 '표주박처럼 생긴 오래된 작은 성'이라는 뜻이다. 지난 토요일, 요즘 일상이 너무 힘들어 바람을 쐴 겸, 언제나 궁금했던 연천 호로고루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입로를 찾기 어려웠고 좀 어수선한 분위기랄까. 옆에 임진강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다. 9월달에는 해바라기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없고 10월에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코스모스도 거의 없었다. 

 

 

기원 후 5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남아있지만, 그 외의 것은 흔적만 남았고 이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일종의 작은 군사 기지 같은 개념으로 강을 끼고 고구려 최남단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입구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는 것이다.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실제 광개토대왕비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라 볼 만하다. 

 

 

강 수심은 얕았고 폭은 넓었다. 근처에 몇 개의 까페가 있었고 그 중 한 곳에 들려 차 한 잔을 했다. 도망치듯 나온 것이라 마음은 불안했다. 밀린 일들이 머리 속으로 스쳐지나갔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과 갈등들이 눈에 보였다. 

 

 

최근 빠져든 현대 물리학의 여러 이론들이나 학설들을 보면,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운동만 있을 뿐이며, 그 운동의 속도에 따라 시간의 속도로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이미 셋팅된 어떤 곳이다. 마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 시간을 평면처럼 본다고 말하듯, 우리는 결코 우리를 넘어선 그 세계를 알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도 이미 정해져 있었던 일이다.  

 

 

우리는 저 우주의 끝에 가 닿을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이미 그리스 비극에서도 다루었던 주제이지 않은가.

 

최근 문재인 정부에서의 군비 증강을 보면서 '화력 덕후', '포방부'와 같은 별명이 비단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조선 시대, 그 이전부터 한반도는 '포'나 '화살'에 집중했던 민족이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마치 와인너리의 포도처럼 나라도, 그 나라의 사람들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사는 것이다. 지금도 양궁은 세계 최고이지 않은가. 한국산 활이 최고이듯, 양궁 선수들도 최고인데, 이건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활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저 호로고루에 있었던 고구려 병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리고 나는. 나는 어떻게 남은 생을 살고 어떤 말을 해야 하며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늘 내일은 물음표처럼 나에게 다가오는데,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그 내일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하니, 나는 어쩌면 좋을까. 내 스스로 나를 개선시키려는, 내 앞에 놓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용기나 의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는데 말이다. 

 

참고로 호로고루는 해바라기가 피는 9월에 가면 좋겠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갈만한 곳이 마땅치 않으니 미리 동선을 짜고 움직여야 된다. 사진 몇 장 찍고 한 바퀴 도는 데 길어도 1시간이면 족한 곳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