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비즈

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지하련 2021. 11. 15. 00:04

 

 

 

이 땅에 태어나서 -  나의 살아온 이야기, 정주영

정주영(지음), 솔출판사, 2015년 개정판(1998년 초판)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체득한 한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시련의 연속이며 연속되는 시련과 싸우면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다. (191쪽)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 만약 우리나라의 조선공사나 다른 선박업자가 이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면 나보다 그들이 먼저 당신들에게 와서 돈을 빌리자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온 것이고,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온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가능, 불가능을 물었으니, 불가능이라는 대답이 온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가능하다. 반드시 해내겠다. 서류 검토를 다시 한 번 해다오.” (412쪽,  조선소를 건립하기 위해 영국에서 돈을 빌리려고 했더니 영국 차관을 해주려고 했던 금융 기관이 한국에다 연락해서 한국이 배를 만들 수 있는지 물어본 다음, 한국은 배를 만들 수 없다고 답변을 받은 다음 에피소드.)

 

위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용기를 얻기 위해서였다. 시련과 고난 앞에선 포기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내 뜻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고 내가 믿었던 이들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엉망이 되어갈 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올해 내 시행착오를 내년에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올해 안으로 가시적인 마무리를 하기 위한 지혜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너무 뒤늦게 읽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지금에서야 선배 기업인들과 직장인들, 노동자들의 노고가 눈에 보였다. (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뽀죡한 지혜를 얻은 건 아니지만)

 

그 동안 나는 외국 저자의 책들만 많이 읽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기업들이 성장해온 역사에 대해 언론에 알려진 정도 이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의 도전과 용기, 무모함과 집념에 대해 무관심했다. 동시에 전략적 사고에 기반한 실행가능성이나 성공요소에 매달렸다. 그래서 고 정주영 회장의 조선업 진출 일화는 한 개인에게 국한된 성공담이나 무용담 정도로만 치부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지금, 그렇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실은 정주영 회장도 그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았고, 박정희 대통령 앞에 가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한 번 더 권했고 결국 ‘구라파’(유럽)에 가지 않았던 탓에 그 곳에 가서 결국 일을 성사시켰다. 집요함, 혹은 집념 앞에서 행운의 여신이 응답한 것이다.

 

밤 늦게 퇴근해 이 책을 틈틈히 읽었다. 요즘 내가 사는 모습이 엉망이다. 일은 꼬여만 가고 삐걱거린다. 어떻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다가 다시 꼬인다. 내가 책임자인 탓에 발을 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한정 투자할 수 있는 시간도, 믿을 만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한다. 매일 아침마다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내자고 결심하지만,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고 밤이 되면 그 날 무엇을 했는지 반성도 하지 못한 채 지쳐 잠에 들기를 반복한다. 스트레스 가득한 일상이라 잠도 깊게 들지 못하고 새벽에 깨기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몇 주전부터 이 책을 자기 전에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고 정주영 회장이 살아온 이야기에 대한 회고담이다. 그는 현대 그룹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현대 한국의 경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업인이다. 또한 대북 사업에 있어서 한 획을 그었으며, 현재 한국의 여러 대기업 집단들이 현대그룹을 모태로 시작되었다. “해봤어?”라는 말로 유명한 그는 도전을 높이 평가했으며, 실패에 대해 관대했다. 그리고 그 실패는 성공을 위한 실패였지, 포기를 위한 실패는 아니었다. 이 점은 이 책 내내 반복된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읽을 것이 아니라 정주영 회장의 이 책을 읽는 편이 더 나을 지도)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부족한 경험과 능력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창의력을 동원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정신력으로 자지 않고 쉬지 않으며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라는 확신이 나한테는 있었다. (208쪽)

 

교과서적인 사고 방식이 곧 고정관념이며 그것이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함정이다.(235쪽)

 

내가 아침마다 되뇌었던 ‘최선’은 정주영 회장에게서의 ‘최선’과는 다른 것이다. 아니 그에게 있어 ‘최선’에 가 닿으려면 나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돌이켜 보건대 내가 생각했던 최선은 아버지, 할버지의 최선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정주영 회장이 생각했던 최선과도 다른 것이다. 그냥 게으른 것이었다. 그러니최선을 다해서 도전해야 되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된다. 최선이라는 게 뭘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이 책은 한국 근대 역사에 대한 한 기업인의 회고록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읽힐 수 있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자면,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전두환 이후 정권에 대해서는 상당히 낮은 평가를 한다. 전체적으로 정치인들을 불신한다.

 

기업을 이끌어오면서 언제나 가장 두려웠던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겪어야 했던 수난이었다. 정변으로 정권이 뒤바뀌거나 정변 없이 정권이 바뀌거나, 어쨌거나 정권만 바뀌면 정경유착이다, 부정축재다로 매도되면서 제일 먼저 곤욕을 치르는 게 항상 기업이다. (96쪽)

 

그런데 이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결국 정치인들의 야비한 압박에 못 이겨 기업인들은 응할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같이 치러야 한다. 이 책에서는 전두환 이후의 고초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한다. 특히 88년 서울올림픽 유치 일화는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무능한 정권이었나는 한 눈에 알게 해준다.

 

나한테는 사전에 한 마디 말도 없이, 5워 어느 날, 문교부 체육 국장이 프린트한 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 사령장을 들고 나타났다. 내용인즉슨, 나고야와의 표대결에서 정부가 당할 망신을 민간인이 대신 당하게 하자는 발상으로, 유치 관할 시장이 아닌 민간 경제인이 유치추진위원장을 맡도록 했다는 얘기였다. (…) 여러 말 할 것 없이, ‘망신을 당해도 정주영이 네가 당해라’는 정부의 의도였다는 것이 지금도 변함없는 내 생각이다. (271쪽)

 

결국 보다 못한 그는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서울올림픽 유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고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이들은 기업인들이었으나, 그 공은 정부가 가지고 갔으니, ….

 

이 책은 한 기업인의 회고록이면서, 현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알게 하며, 동시에 한국의 여러 정권들이 어떻게 기업을 대했는가를 알게 해준다. 특히 정주영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찰력 있는 결단들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였으며,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소양강 댐 공사 이야기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한 해 국가 예산의 3분의 1에 가까운 금액을 배정했다는 것은 지금 봐도 무모한 결정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조선업 진출도 그의 생각이었으며, 88 올림픽 유치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평가가 갈리는 것은 정치적 잘못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민주화도 함께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반대로 전두환 이후의 정권들에 대한 평가는 야박하기만 하다. 하물며 경제에 대한 아무런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5공, 6공의 여러 실책들은 많은 기업들을 힘들게 하였다. 어쩌면 그 결과 IMF가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또한 한국 근대사에 대해 많은 부분을 다시 알게 해준다. 또한 한국 기업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으니, 여러모로 가치 있는 독서였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