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우주/비평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지하련 2021. 11. 24. 18:38

 


아직 나는 만나지 못했다 





Edgar Degas
A Woman Seated beside a Vase of Flowers
Oil on Canvas, 73.7 x 92.7cm, 1865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은 저 사각의 캔버스 안 뿐이다. 저 사각형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것이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된다. Esse est Percepi(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주의자들은 저 사각형 안에 모든 것들을 담아내려 했다. 캔버스, 혹은 작품의 공간 안에 시작과 끝이 있어야 했다.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 속에 그리스 철학 전체를 담아내려고 했다면, 젊은 미켈란젤로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할 때의 순간을, 그 순간들 모두를 그려낸다. 그래서 고전주의 작품은 자기 완결적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요소들은 의미를 지니고 근거를 가진다. 그것이 없다면 고전주의 작품 속에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 이를 통해 고전주의자들은 지각되는 것 너머, 지각의 한계를 부정한다.

 

고전주의 작품에는 내 바깥의, 내가 모르는 당신은 없다. 당신이라 불리는 미지의 것, 타자를 위한 장소는 없다. 당신은 아직 나에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는 당신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아예 없는 것, 즉 무(nothingness)도 아니다. 지각되기 위해선 먼저 단어(개념)가 있어야 한다. 애초에 경험론 철학은 고전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귀납법적이다. 무한한 시간과 운동 속에서 켜켜이 쌓여 형체를 갖추어 간다. 누적적이다. 하루하루 낯설고 이질적이며 변화무쌍한 만남들을 통해 창조되는 어떤 사건들의 집합이다. 동일한 경험 세계를 살아가면서도 고전주의자들은 변화하는 이 세계 너머 변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진리를 향해 간다. 지각되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데카르트적 나(근대적 주체)는 모든 감각 경험들을 부정한다. 생각하는 나로 시작해 새롭게 외부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그리고 거기에는 오직 나, 도구적 이성으로 추론하는 나, 원근법적 자아만 있다. 고전주의는 언제나 기하학적 원근법을 부른다. 그 속에 나는 언제나 혼자이며, 혼자로서 만족한다. 데카르트적 나는 유아론(唯我論)적이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낄 수도 없다는 것을 어찌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과감하게 없다고 말하자. 감각인식이 전부라고 믿자.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의 오감(五感)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의 이 생(生)이 끝나기 전에 다시 물어보자. 과연 저 사각의 캔버스 밖은 존재하는가?

 

(고전주의자들에게) 에드가 드가의 저 여인은 낯설다. 기괴하며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녀는 어떤 연유로 사각의 캔버스 밖에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일까. 저 방은 어디이며 꽃들은 어떤 목적으로 누가 놓아둔 것일까. 다채로운 색의 꽃들이 사각의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보는 이의 시선은 자꾸만 저 여인에게만 향한다. 왜일까.

 

고전주의자들이 허용하지 않았던 방식, 예술 작품 속에 이질적인 것, 낯선 것, 기묘한 것들로서의 타자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초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서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칸트를 위시한 계몽주의 철학에 의해서다. 그러나 이 타자는 인간적이지 않은 것, 그래서 인간을 넘어선 어떤 존재, 때로는 숭고한 자연(혹은 괴물)으로 묘사되고 표현되었다. 내가 아닌 너라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었다. 거대한 폭풍이거나 저 거스를 수 없는 죽음. 해석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해석이 가능하더라도 해석되지 않은 채 남겨져야 하는 어떤 신성함. 그것이 타자였던 셈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타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캔버스 안으로도 들어오지 못하는 어떤 금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드가의 저 여인은 왜 사각 공간 밖을 향하고 있는 걸까? 즉 낭만주의의 타자는 그녀가 기다리는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타자가 아니다.

 

그녀는 누구를, 혹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만났을까?

 

모든 관계는 타동사적이다. 나는 대상을 만진다. 나는 타자를 본다. 하지만 나는 타자가 아니다. 나는 완전히 혼자다. 그러므로 내 안에서의 존재,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존재함은 어떤 지향성도 어떤 관계도 없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요소를 구성한다.
-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34쪽(강영안 옮김, 문예출판사, 1996년)

 

우리가 타자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내가 아닌 것 모두를 뜻한다. 그것은 데카르트적 자아가 바라보고 대상화(objectification)하는 모든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데카르트가 발명한 근대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래야만 세상은 질서를 갖출 수 있으며 원근법적으로 세계는 해석되고 구성될 수 있다. 그리고 대상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모든 사건들은 그 이후에 일어난다.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당신은 이미 대상화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름을 가지고 원근법적으로 구조화된 질서 속에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당신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당신이 대상화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없다. 당신은 암흑이며, 무의미한 것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둠이다.

 

하지만 대상화되기 전이라도 이미 있다면. 감각적으로 지금 여기 혹은 저기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당신의 이름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느낀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언젠가 어느 에세이에서 하와이의 호텔에 머물 때 테라스 선반 위에 놓인 유리컵이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광경과 ‘만났다’고 썼다. 70여 년 생애 동안 수많은 컵을 봤을 것이며, 값비싼 것에서 드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리컵을 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세계가 선명하고 생생히 빛나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컵이 ‘컵’이라는 물상적 대상을 초월하고 이쪽은 상의 닫힌 의식을 깨고, 서로가 돌연 빛 속에서 열린 세계로 나온 것이다. 아니, 만남이 세계를 열어 빛나게 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만남은 상호적인 벌어짐이며 매개적인 장소에 입회하는 것이다. 
- 이우환, <<만남을 찾아서>>, 65쪽(김혜신 옮김, 학고재, 2011년)

 

캔버스 바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드가의 여인은, 어쩌면 현대 추상 미술의 아수라장을 예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타자’라는 대상화 대신 스스로 타자가 되기 위해 익명성의 바다로 몸을 던지고 있는지도. 하지만 그것은 공포다. 미술 양식에서의 원근법은 뒤로 물러났으나, 근대적 주체에 의한 대상화는 현대 미술가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오브제는 세계의 소유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근대 부르주아 가치관이 만들어낸 표상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허상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인간의 자기 확장 의지가 자신의 관념을 대상화한 세계이다. 
- 이우환, <<만남을 찾아서>>, 28쪽

 

근대적 주체에 의해 대상화되던 양식을 극복하기 위해, 이우환이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대상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지각 이전에 이미 대상화되어버린 존재를 대상화 이전 단계로, 그래서 감각적으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주체와 대상과의 만남이 이우환의 목적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는 모르는 것, 경험해보지 못한 것, 예측되지 않음의 공포가 깃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대상화에 대한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우환
관계항 - 지각과 현상
유리판, 자연석, 230×270×1.8cm, 80×80×75cm, 1969년
부산시립미술관

 

 

하지만 드가의 저 여인이 온화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저 캔버스 밖 풍경은 어떨까? 그 곳은 미지의 세계, 이름없는 세계, 지각되지 않은 세계다. 그 세계를 마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험한 도전이자 모험이다.

 

타인과 대화를 개시하는 행위는 자신의 무기들과 방책들을 내버리는 행위, 자신의 견해들로 진입하는 관문들을 열어젖히는 행위, 타자-국외자-에게 자신을 노출하는 행위, 자신을 향한 느닷없는 공격들, 논쟁, 비난에 자신을 개방하는 행위다. 
- 알폰소 링기스,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은 자들의 공동체>>, 137쪽(김성균 옮김, 바다출판사, 2013년)

 

다시 우리는, 나는 드가의 작품 앞에 선다. 19세기 후반, 인상주의 예술은 반원근법적이며 근대적 자아에게 대한 도전이었으나, 근대적 자아에 대한 극복은 아니었다. 의미 있는 문제 제기였을 수 있으나, 미지의 세계 속에서 아직 우리 앞에서 나타나지 않은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뜻하지 않았다.

 

근대적 자아 바깥엔 아무 것도 없다. 19세기 후반부터 근대적 자아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 근대적 자아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버릴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근대적 자아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현대 예술에서의 그 시도는 두려움이자 공포였다. 내 몸이 딱딱한 벌레로 변하는 과정이거나 인간의 언어를 잃거나 절대 오지 않을 구원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 실은 만날 준비도 못했다. 나는 당신이 저기 있음을 어렴풋이 느낄 지라도, 당신과의 만남이 가지는 거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름 없는 당신, 타자를. 드가의 저 여인이 아직도 사각의 캔버스 밖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어떤 존재/사건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에겐 끝도 없이 깊은 어둠이므로. 

 

 

 

* 이 글은 2021년 우물1호에 실렸다. https://www.instagram.com/woomool.official/?hl=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