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지음), 강방화(옮김), 소미미디어, 2021
이불에서 팔만 꺼내 시계를 얼굴 가까이 대어 보니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환갑 기념으로 아내 세쓰코와 딸 요코가 센다이에서 사다 준 세이코 손목시계였다. (154쪽)
최근 소설가 유미리의 근작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마치 사라진 듯, 한국의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헌책으론 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타까웠다. 재일한국인 여류 소설가. 아쿠타가와상 수상 때부터 갖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가. 재일한국인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중간자적 존재를 무기 삼아 싸우던 소설가. 그녀의 소설들은 어느 순간 번역되지 않았고 그녀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 어린 시절, 자신을 위로해주던 이들은 모두 사자(死者)였다고 했던, 다자이 오사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 이제 그녀도 나이가 들어 중년을 지나고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적대적 환경과 그녀의 시끄러웠던 사생활.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그녀, 아니면 한국인(조선인)이면서 일본인인 유미리, 혹은 야나기 미사토.
그녀의 소설도 크게는 일본의 소설적 전통-사소설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공간을 드러내며 해석하고 재구성하면서 독자를 그 공간 안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이젠 그녀의 소설들, <<가족시네마>>, <<풀하우스>>라던가, 다른 소설들은 기억나지 않고, 고작 한때 자주 한국을 오갔던 그 시절만 기억날 뿐이다. 그러다 이 책의 재출간 소식을 들었다. 2014년에 일본에서 나온 이 소설은, 2년 후 한국에서 <<우에노 역 공원 출구>>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품절/절판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올해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으로 개정되어 나왔다. 그 사이 역자도 바뀌었고. 한동안 유미리의 소설들은 번역되지 않았으니, 이 소설은 그 동안 소설가 유미리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어쩌면 변하지 않았을 수도(일본에서는 계속 활동해왔으나).
인생이란 첫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가 나오고, 그렇게 차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는 한 권의 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은 책 속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달랐다. 글자들이 늘어서 있고 쪽수가 매겨져 있어도 일관된 줄거리가 없다. 끝이 있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남는다-.
낡은 집을 허문 공터에 남은 나무처럼 … …
시든 꽃을 거두고 빈 꽃 병에 남은 물처럼 … …
남았다. (10쪽)
소설은 부드럽고 살짝 우울하게 시작된다. 결말은 더 우울하지만.
항상 미래로 뒷걸음치면서 과거만 바라고 살아왔다. (25쪽)
소설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설의 주인공이 노숙자임을 알게 된다. 그 동안 내가 읽어왔던 유미리스럽지 않았다(내가 아는 유미리는 어떤 소설가였던 걸까). 그렇다면 노숙자이면서 여성일까 하며 생각했지만, 남성 화자였다. 소설가 유미리에게 어떤 목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이때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다. 자신이 잘 모르는 영역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제 소설은 이 가즈라는 주인공의 과거를 보여주며 현재를 변호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이 주인공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고 연금이 나온다는 사실을 소설 후반부에 알게 되기 때문이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
“푹푹 찌네요.” 마리가 방충망만 남기고 반쯤 연 창에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빗소리와 함께 흘러들어 왔다. 비 냄새를 맡으며 마리가 만들어준 스크램블드 에그와 토스트를 먹고 마리와 개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막 스물한 살이 된 마리를 늙은 나와 이 집에 붙들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하다. 할아버지는 도쿄에 간다. 이 집에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거다.” 그렇게 메모를 남긴 다음, 돈 벌러 나갈 때마 썼던 검은 보스턴백을 벽장에서 꺼내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챙겨넣었다. (135쪽)
주인공이 아내와 살던 고향 집을 나서는 그 순간,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엑스레이 기사 자격증을 딴 아들이 스무살 때 자취방에서 혼자 죽고, 아내 세쓰코과 같은 이부자리에서 죽었을 때까지, 삶의 목적은 어쩌면 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향에 있었던 적이 없다. 그는 늘 타지에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 아이들과의 추억도 거의 없고 자라는 모습을 본 적도 없으며 아이들의 친구들과는 만난 적도 없다. 고이치의 장례식 때 만나는 아들의 친구를 보며, 가즈는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고이치를 안치한 곳은 고이치가 태어난 부쓰마(집에서 조상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위패 등을 모신 불단을 마련한 방)였다.
얼굴에 씌운 흰 천을 두손으로 걷는다.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건 갓난아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58쪽)
아들의 얼굴을 제대로 본 것이, 아들이 죽었을 때라는 사실은 노동을 하며 타지생활을 한 가즈의 인생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소설의 현재는 우에노공원의 가즈이지만, 소설은 화자의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며, 노숙자 가즈의 일상과 그 곳으로 흘러 들어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처절한 실존적 고뇌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다고 할까.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결국 우에노 공원의 노숙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버틴다. 소설가 유미리는 이들의 삶을 보여주며, 어떤 구원이나 구조를 요청하는 걸까.
빗소리에 잠이 깨었다.
세쓰코는 늘 일찍 일어나 내가 눈을 뜨는 7시 무렵에는 빨래와 마당청소까지 한 바탕 끝내놓고 부엌에서는 미소된장국과 밥 짓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다… …
뚝, 뚝 하고 물받이에서 떨어지는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렸다.
빗발이 꽤 센 모양이다……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커튼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집안을 비로 물들였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옆 이불에 세쓰코가 누워있었다.
깨우려고 팔을 뻗었더니, 차갑다 - .
만져진 건 이불 위로 빠져나온 세쓰코의 팔이었다. (131쪽)
아내 세쓰코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은 의외로 담담하다. 고이치의 죽음은 충격이었고 아내의 죽음을 예정된 듯한 느낌이다. 가즈가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었던 시기는 얼마되지 않는다. 아내와의 7년 남짓.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일본의 민낯과 만난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된 나라, 빈부격차와 가난,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무관심한 일본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선진국 일본이 아니라 무언가를 감추고 감춘 나라 일본. 그래서 이 소설은 일본에서 출간 당시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배경으로 일본의 근현대사를 소설로 조망하면서 결국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이들은 도쿄 사람이 아니라 후쿠시마 지역의, 일본의 발전에 기여했으면서도 결국 가난과 고통을 벗어나지 못해 노숙자가 된 이들을 끄집어낸 것이다(한국은 그렇다면 얼마나 다를까. 이제 이것을 고민해야 될 시기이다).
구덩이였다면 기어 올라올 수도 있겠지만 절벽에서 발이 미끄러지면 두 번 다시 인생이라는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다. 추락을 멈출 수 있는 건 죽음 뿐이다. 그래도 죽을 때가지는 살아있어야 하니 근근이 용돈 벌이를 할 수밖에 없다. (92쪽)
결국 주인공 가즈의(어쩌면 우리의) 선택지는 죽음 뿐인 건가. 소설의 결말은 몽환적이나, 그 곳에서도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등장하는 그 지점에선 아차 싶을 정도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소설가 유미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에서 나고 자랐고 일본어로 읽고 쓰고 말하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갖고 있는’ 유미리.
일본과 대한민국의 관계가 좋을 때 ‘재일 한국인’은 양국의 가교라고 불리지만, 현재 양국의 관계는 최악이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혐오 표현을 전례가 없을 정도로 서슴없이 하게 되었고 그 풍조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려면 “싫으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일본에서 나가라”는 말을 가차 없이 퍼붓는다.
나는 내가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측이어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온 세계에 존재하는,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
이 소설은 일본 내에서 차별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일본의 현재를 보여주고자 함에 있다. 실제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그 곳에 가지 못하고 타지에서 돈벌이에 매달렸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로 인해 아이들과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고 일부는 가족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회복이 불가능한 만큼 상처를 입은 원전 주변 지역에 살면서 소설을 쓰고 서점을 운영하고 연극을 올리는 이유가 있다. 원전 사고로 집과 고향을 잃고 어쩔 수 없이 표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한국전쟁으로 집과 고향을 잃고 표류 끝에 태어난 내 존재 자체의 숙명적인 아픔이 공명했기 때문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
그리고 현재 그녀는 그 곳 인근에서 서점을 열었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2011년 4월 21일, 나는 당시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바닷가 관광지)에 살고 있었다. 원전 반경 20킬로미터 이내 지역이 ‘경계 구역’으로 지정되어 봉쇄된다는 발표를 TV에서 본 나는 곧바로 현지로 떠났다. 후쿠시마와 나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그날부터였다.
2012년 2월 초부터 2018년 3월 말까지 6년 동안, 미나미소마 시청 안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두 사람과 한 사람>이라는 프로그램을 매주 금요일에 자원봉사로 담당하며 주민 6백명의 이야기를 녹음했다.
2015년 4워에는 원전에서 25킬로미터 지점인 미나미소마시 하라마치구로 이사했고 2017년 7워에는 원전에서 1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구 ‘경계구역’ 미나미소마시 오다카구로 이사해 서점을 열었다. (저자 후기 중에서)
이 소설의 저자 후기를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마티, 2008년)을 추천한다)
일본 국민의 대부분이 국가와 시정촌의 책무 포기를 지지하는 이유는, 자신은 결코 배제와 차별을 당하는 입장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과신이 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생활 빈곤자로서 생활보호 등 공적 지원을 받았어야 할 노숙자들이 언제까지나 길 위에 방치되어 있는 것은,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본 국민들이 지금의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은 고령의 노숙자가 되어 길을 떠돌고 있는, 과거에 도호쿠나 홋카이도의 가난한 농촌에서 올라온 청년들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일본이라는 나라가 경제 성장을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해보았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저자 후기 중에서)
이 소설을 쓸 당시 유미리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언제나 ‘어떻게 하면 죽을까’만 고민했다고. 계속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하며, 이 소설은 겨우겨우 휴대폰으로 트위터에 140자씩 써서 완성했다고 한다. (참고 https://nikkan-spa.jp/1721681)
소설은 2020년 도쿄올림픽 개최 준비로 인한 우에노공원 노숙자들의 처리 문제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이 중첩되어져 있다. 상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건들리고 있었던 셈이다. 현재 그녀는 미나미소마에서 북카페 <<Full House>>을 운영하고 있다. 2020년에 이 소설의 영역본이 전미도서상(번역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이 때 어느 자리에서 '일본인 여성 작가가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라고 소개되어, 그녀는 자신은 일본인이 아니라고 정정했는데, SNS에서 '일본이 그렇게 싫다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라고 공격 당했다. 실은 그런 일이 그녀에게는 익숙해지 않겠지만, 자주 있는 종류의 일이다. 그녀가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을 때에도 우익 단체에서 테러를 하겠다고 했을 정도니.
유미리(야나기 미사토)가 운영하고 있는 북카페 <<Full House>>
(그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아, 이 소설도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 이 북카페는 JR조반선 고다카역에서 걸어서 3분 거리라고 한다. 일본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여길 가는 걸로)
https://odaka-fullhouse.jp/ 북카페 풀하우스 홈페이지. 영업시간이나 도서정보 및 행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설가 유미리의 트위터 : https://twitter.com/yu_miri_0622
소설가 유미리의 홈페이지 : http://yu-miri.com/
소설가 유미리에 대한 간단한 소개 :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9591
(1997년도 기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