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스케일이 전복된 세계, 제이머 헌터

지하련 2022. 1. 2. 10:30

 

 

스케일이 전복된 세계 Not To Scale

제이머 헌트Jamer Hunt(지음), 홍경탁(옮김), 어크로스

 

환경주의자들의 진언. “글로벌하게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 (243쪽)

 

 

스케일(scale)을 ‘사물을 측정하거나 비교하는 체계로 사용되는 숫자의 범위’라고 책에선 설명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규모'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이 단어는 '저울, 또는 저울의 눈금이나 비례나 지도의 축척'을 뜻하기도 하며, 음악에서는 ‘음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측정 기준이나 등급'을 뜻한다.

 

이 책에서 '숫자의 범위'라고 설명한 이유는 측정 기준 안에서는 우리는 알 수 있고 이 범위나 기준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측정하지 못해, 알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다. 기존에 1에서 10까지의 측정 범위가 있었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어서 11이나 12, 또는 20으로 측정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스케일'을 바꾸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어떤 스케일을 가지고 세계를 측정하고 해석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든 상황은 달라진다. 문제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 해결한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도 ‘스케일’을 새롭게 적용한 음악인 것도, 기존 음악의 정의나 범위를 새롭게 하여 예술의 혁신(innovation)을 도모한 것이다. 

 

이 책은 우리가 기존에 사용하던 스케일이 전복되었고(사용할 수 없고) 이 전복된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움직여야 하는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복된 세계가 바로 현대, 바로 디지털 시대다.

 

인지 가능하고 물리적인 특성을 미세하고 빛나는 픽셀로 바꾸는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는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의 경제와 생활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를 재창조했다. (11쪽)

 

디지털화되는 세계를 '비물질화'로 표현하고 있다. 픽셀로 바꾼다는 표현은 다소 제한적인 범위에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저자의 배경을 이해한다면 적절한 예시다. 디자인 혁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이머 헌트는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스케일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매우 작은 범위에서 큰 범위로 확대해가며, 문제가 어떻게 해석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다. 

 

‘이 책은 예측할 수 없는 시스템 내부에서의 우리의 위치, 그 시스템을 재구성하는 힘, 시스템과 상호작용할 때 느껴지는 불확실성을 탐구한다’(18쪽)고 적고 있지만, 난해한 이론을 다루는 책은 아니다. 도리어 그래서 이 책은 의외로 읽을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것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며 다시 생각해보게 하니까. 

 

스케일은 다분히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며, 측정measurement이라는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다. (42쪽)

 

벤트에 따르면 문제는 스케일이다. 개미가 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책의 크기가 작아지면 페이지 사이의 분자 결합이 너무 강해져 개미가 책장을 넘길 수 없다는 것이다. (93쪽)

 

벤트의 사고 실험은 스케일 변화에서 놀랄만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스케일 변화에 따라 시스템의 작용이 변화하는 경우)을 ‘스칼라 분산 Scalar variance’ 혹은 ‘스칼라 비대칭scalar asymmetry’이라고 부른다. (94쪽) 

 

관점(스케일)에 따라서 문제는 달라진다. 개미가 우리와 같은 문명을 이루지 못한 것은 어쩌면 스케일의 문제인 셈이다. 따라서 스케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화두가 된다.   

 

- 찰스 임스Charles Eames와 레이 임스Ray Eames 부부의 <10의 거듭제곱>  : 스케일의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영상 

 

따라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인식하고 측정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해석하고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선 그것을 넘어서라고 주문한다. 일종의 틀을 깨는 것이다. 이는 다른 책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스케일'의 관점에서 접근하라고 강조한다. 

 

수십 억이나 수조 같은 숫자 또한 인간의 지각과 경험을 벗어난다. 한 사람이 100만을 세려면 약 12일이 걸리고, 10억까지는 32년이 걸리며, 1조까지 세는 데는 3만 2000년이 넘게 걸린다. 인간은 셀 수 없는 숫자라는 뜻이다.(158쪽)

 

애초에 우리가 아는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란 제한적이다. 더구나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저자 제이머 헌터는 두 가지의 방법론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스케일 프레이밍, 다른 하나는 스케폴딩이다. 이 두 방법론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로바로 사용하던 방식 또한 아니다. 도리어 이 책을 통해 이 방법들에 대해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할까. 

 

스케일 프레이밍scalar framing
이는 가정을 의심하고 협업을 유도하며 레버리지 포인트가 명백하지 않은 문제에서 그 지점을 찾아주는 유동적이고 개념적인 틀이다. (182쪽)

 

책에서는 뉴욕시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을 예로 설명하고 있으며, 개인적인 측면에서의 스케일로 시작해 확대해 나가는 방식을 제시한다. 공간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것이다. 그 때마다 필요한 것들이 달라지고 고민해야 할 것들도 전혀 달라진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새로운 스케일에서 새로운 기회가 나타난다. 
1. 지역적인 문제는 또한 전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2. 자신만의 능력을 최대화하는 스케일에서 행동하라
3. 3. 문제는 새로운 스케일을 기반으로 재구성할 때 통찰을 얻는다
4. 새로운 스케일에서 새로운 협력자가 나타날 수 있다.  (196쪽)

 

스케일을 통해 생각하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가까운 것과 먼 것, 위험과 보상 사이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행동하기에 바람직한 스케일이란 정해져 있지 않다. 우리는 문제를 작게 쪼개어 보면서 무엇이 가능한지 어떻게 문제가 바뀌는지 드러나게 할 수 있다. (205쪽)

 

스캐폴딩의 대표적인 예는 '위키피디아'이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한 방법틀의 제시인 셈이다. 스캐폴딩의 접근법은 아래와 같다. 

 

스캐폴딩scaffolding: 매개체 역할을 하는 프레임워크 설계
1. 조율
2. 아이디어 구상
3. 프로토타입 만들기
4. 프로그래밍
5. 반복
6. 피드백 (220쪽)

 

*  *

 

이 책에는 다양한 사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일부를 메모해둔다. 네덜란드의 교통 정책 전문가 한스 몬데르만은 팀 하포드의 <<메시Messy>>에서도 소개된 인물이다. 네덜란드 드라흐턴 교차로 사례로 등장했는데, 이 책에서도 사례로 언급되었다. 

 

몬데르만은 공학적 계획보다는 개별 운전자 수준에서 생각하며 상황을 재구성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손을 잡고 복잡함을 통과시켜주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헤치고 나아갈 권한을 넘기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확실성을 수용했다. ‘공유공간shared space’으로 알려진 몬데르만의 철학은, 자동차와 교통시스템이 아닌 보행자와 운전자를 대변하는 관점으로 교통문제를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260쪽) 

 

Drachten&rsquo;s busiest intersection before Hans Monderman.

 

Drachten&rsquo;s busiest intersection after Hans Monderman.

 

건널목과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보다 운전자에게 모든 걸 맡긴 원형교차로에서 사고 발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제이머 헌트는 이를 '스케일'로 해석하고 있지만, 팀 하포드는 <<메시Messy>>를 통해 무질서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사람의 자율에 맡기는 것도 해결책임을 이야기한다. 하포드의 견해는 조금 더 광범위한 것이긴 하지만, 스케일의 관점에서 어떤 경우는 질서로, 어떤 경우는 무질서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카오스이론처럼)

 

2016년 3월, 서리 나노시스템스Surry Nano Systems라는 영국회사는 대단한 혁신을 발표했다. 서리 나노 시스템스는 그 때까지 밴타블랙Vantablack을 만든 회사로 유명했다. 밴타블랙은 너무 어두워서 가시광선의 0.035퍼센트만 남기고 모두 흡수해버리는 물질이다. 다시 말해 너무 어두워서 거의 보이지 않는 물질이다. 이들은 2016년에 발표한 것은 새롭게 발견한 더 검은 물질이었다. 얼마나 더 검을까? 반사된 빛을 측정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분광계는 그 물질에 반사되는 빛을 감지할 수 없었다. (82쪽)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밴타블랙은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밴타블랙을 보면서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 밴타블랙을 발명한 사람(83쪽)

 

서리 나노시스템스는 그 물질에 대한 창조적 사용을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라는 단 한 명의 예술가에게만 허용하는 예상치 못한 조치를 취했다. (84쪽)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은 리움 미술관에도 소장되어 있지만 밴타블랙으로 만든 작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카푸어 전시 때 밴타블랙으로 만든 작품으로 전시한 바 있었다. 아래 작품을 보라. 그냥 바닥에 큰 구멍이 뚫린 듯 하다. 카푸어 전시 도록에서 밴타블랙이라는 단어를 보았으나, 이것이 서리 나노시스템스에서 개발한 것이며, 어떤 이유로 가장 어두운 색깔인지는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Descent into Limbo, Anish Kapoor

 


트레버 페글랜의 사진 작품은 대개(의도적으로) 시각적으로 방향을 잃게 만든다. 정치지리학을 전공한 페글렌은 과학수사적인 전략과 다큐멘터리 도구를 사용하여 감시, 비밀작전 등 정부의 합법, 준합법, 불법적 활동의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를 보여준다. “공식” 지도의 빈 공간을 채워넣고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반사된 빛을 포착함으로써 그의 사진은 정부의 감추어진 네트워크와 공작, 그리고 그 공작자들의 흔적을 포착한다. 꼼꼼한 연구와 드론을 찾아다니는 사람들과 전 세계의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페글렌의 작품은 저널리즘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되었다. (128쪽 ~ 129쪽) 

 

Untitled (Reaper Drone), Trevor Paglen

 

트레버 페글렌은 2019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진 작품이며, 사진에선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드론이 찍혀있다. 스케일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보는 것도 달라진다. 일종의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경종을 울린다고 할까. 

 

 

* 팀 하포드, <<메시Messy>>, 위즈덤하우스  https://intempus.tistory.com/2204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돈으로 뛰어들어라고 주장한

intempus.tistory.com

 

* 아니쉬 카푸어, 리움미술관, 2012년 https://intempus.tistory.com/1926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 리움, 2012.10-2013.2

아니쉬 카푸어 Anish Kapoor 2012.10.25 - 2013.2.8 삼성미술관 Leeum 황량한 현대 미술의 첨단에 카푸어가 불과 몇 명의 위대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우뚝 서 있음은 하나의 구원이다. 시각의 초월적인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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