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어둠 속의 희망, 리베카 솔닛

지하련 2022. 2. 6. 18:24

 

어둠 속의 희망 Hope in the dark

리베카 솔닛Rebecca Sonit(지음), 설준규(옮김), 창비

 

 

불가리아 작가 마리아 포포바에 따르면, “희망이 빠진 비판적 사유는 냉소지만, 비판적 사유가 빠진 희망은 치기稚氣다” (11쪽)

 

희망을 알지 못하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포용이며, 낙관론자와 비관론자 모두의 확신에 대한 대안이다.(12쪽)

 

“미래는 오늘 그것을 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 말컴 엑스 (19쪽)

 

“유한한 실망은 받아들여야겠지만, 무한한 희망은 잃지 말아야 한다.” - 마틴 루서 킹 (19쪽)

 

“기억사실이 절망을 빚어내듯 기억은 희망을 빚어낸다.” - 월터 브루거먼 (20쪽)

 

책 초반은 희망에 대한 메시지로 가득하다. 많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고 리베카 솔닛은 힘주어 말한다. “희망은 행동을 요구하고 행동은 희망없이는 불가능하다”(43쪽)라고. 정치적으로 진보 좌파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책은 일종의 정치 에세이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뭔가 서정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문장의 수필집을 떠올리고 이 책을 샀다면 실망하게 된다. 또한 인문학적이면서 현실 분석적인 글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이 여기저기 기고하고 발표한 정치적 선전선언문을 모은 것이기에 상당히 호소적이며 단언적이다. 또한 2004년에 초판본이 나온 책이라,  지금, 2022년에 읽기에는 다소 철 지난 느낌의 발언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미국에서 인쇄되어 나올 정도이니(2019년에 양장본이 다시 나왔다), 많은 이들이 찾아 읽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남아메리카에서는 미래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 한달 뒤, 칠레는 영국이 못 했던 것을 해낸다. 삐노체뜨를 법정에 세운 것이다. 그리고 2004년 8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투표에서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투표에서 베네수엘라 사람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지만 실패했던 2002년 쿠데타의 표적이었던 좌파 민중주의자 우고 차베스에게 또다시 압도적인 승리의 표를 몰아주었다. 그해 봄 아르헨띠나의 43대 대통령 네스또르 끼르치네르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아르헨띠나 민중항쟁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제통화기금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그 전해 브라질이 룰라의 통치 하에 세계 무역기구에 반대하는 개발도상국가들의 저항을 이끈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볼리비아 사람들은 천연가스의 민영화에 맞서 너무도 맹렬히 싸운 나머지 그들의 신자유주의적 대통령을 마이애미의 망명지로 내몰았다. (51쪽~54쪽)

 

그러나 현재 남아메리카의 사정은 그렇게 밝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때 열광적이던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좌파 운동가들은 기억한다. 하긴 나도 흥분해서 남미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구나 라고 생각했으니(마음 속으로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진보적 지식이나 좌파운동가들은 진보적인 정권이나 좌파 정부가 집권하면, 더 나아가 혁명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바 ‘희망’이라면, 이 책은 상당히 일관되게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가령 한국에서 그나마 진보적이라고 여겨지는 정의당이 집권하면 한국이 좋아질까?

 

내가 자주 (특히 감옥처럼 유난히 희망 없는 상황에서) 생각하는 그런 종류의 희망은 세계의 상태가 아니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태라고 이해한다. 우리 내부에 희망을 지니고 있거나 지니고 있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건 영혼의 창원에 속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세계에 관한 어떤 특정한 관측이나 상황 평가에 기대지 않는다. 희망은 예언이 아니다. 그건 영혼의 지향이자 마음의 지향이어서, 직접 경험되는 세계를 초월하며 그 세계의 지평 너머 어느 곳에 닻을 내리고 있다. 이런 깊고 강력한 의미의 희망은 상황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기쁨이나, 머지 않아 성공할 것이 분명한 사업에 기꺼이 투자하려는 마음과는 다르다. 그 같은 희망은 어떤 일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일이 선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 바츨라프 하벨 (57쪽)

 

이 책은 단점이자 장점은 미래가 불투명한 환경 속에서 희망을 가지자는 메시지로 일관한다. 그러나 그 불투명한 미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이 경제적 불평등인지, 여성들이나 농민들의 인권 향상인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인지, 이 책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또한 제 3세계의 핍박 받는 민중들의 해방을 의미하는지 독자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이며 체코 대통령이었던 바츨라프 하벨(1936~2011)의 글이 주는 울림은 적지 않다. 희망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 이는 리베카 솔닛 또한 이 책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인디언이 나선 건 시계태엽을 감기 위해서, 그리하여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복수형의 미래가 도래하는 것을 담보하기 위해서인데, 우리의 행진으로써 인류의 시계가 행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인디언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것을 읽는 기술에 의지한다. 그것이 우리를 토착민으로서, 멕시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살아있게 하는 꿈이므로, 투쟁을 통해 우린 미래를 읽고 있다. 어제 이미 씨 뿌려져 오늘 경작되고 있으며, 싸움을 통해서만, 다시 말해 꿈을 통해서만 수확할 수 있는 미래를” (120쪽)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사회, 이 세계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이다. 사바티스타의 마르꼬스 부사령관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민족(원주민, 인디언) 운동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원주민 자치에 대해서도. 

 

행진은 몸이 걷기를 통해 말하는 때이고, 사적 시민이 공중公衆이라는 저 신비로운 것으로 변하는 때이며, 도시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것이 정치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때다. (148쪽)

 

그렇다면 행진이 필요한 시기일까? 여러 차례의 금융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해법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났다. 도리어 적극적인 국가개입으로 살아난 금융 시스템과 그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반감만 더욱 커지고 있다. 또한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규제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좌파들의 강력한 투쟁으로 이루어진 결과인가? 아니면 그냥 세계가 그렇게 움직인 것인가?

 

네바다주 벽지 유리카에서 열린 ‘시민경보’의 1996년 이사회 때, 달리 맥주 마실 술집이 없었던 탓에 반환경론자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우리 모두 한잔씩 하게 됐다. 바 뒤쪽에 판매용으로 펼쳐놓은 자주색 랭글러WRANGLER 티셔츠에는 ‘랭글러’가 무엇의 약자인지 쓰여 있었다. 그건 ‘쓰잘 데 없는 좌파 환경운동가 급진똥대가리들에 반대하는 서부 목장주들’ Western Ranchers Against No Good Leftist Environmentalist Radical Shitheads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환경운동가들이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기는, 큰 모자를 쓴 젊은 목장주 옆자리에 앉게 됐다. 알고 보니 그의 집안은 그 지역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목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근사한 새 용어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지속 가능한 순환방목법에 대해 꿰뚫고 있었으며, 자신이 싫어하는 약탈식 방목 방식을 쓰는 목장주들 또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광산업자들과는 달리 자기 목장 풀로 소의 배를 불린다고 자랑했다. 저녁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나는 그에게 그가 하는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는 환경운동가들도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었으며, 그는 내게 위스키를 사고 있었다. (209쪽 ~ 210쪽)

 

오랫동안 미국의 환경운동가들은 목장주를 악마 취급했다고 한다. 자연을 황폐화시킨다고. 하지만 리베카 솔닛은 젊은 목장주와 이야기를 나누며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의 희망은 어쩌면 적들 - 보수주의자들과 자본가들 - 사이에서 싹트고 있을 지도 모른다.  폴 크루그먼이 미 공화당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을 때 미국 사회와 경제가 좋았다고 말했듯이, 보수주의자들이 조금은 진보에 가까운 생각과 활동을 하는 시대를 꿈꾸는 것이 조금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어쩌면 세상은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민주당이 진보적일까? 나는 민주당은 보수적이고 거대 야당은 수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의당은 도리어 진보적이지 않고 진보를 가장한 포퓰리즘 정당이라 생각한다. 또한 나는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을 상당히 경멸하는데, 왜냐면 그들은 이미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적 약자처럼,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지를 받는, 자칭 타칭 진보 정당이나 진보 정치인들도 역겹긴 매 한가지다. 그래서 진보적 지식인, 진보 정당, 진보 정치인들이 이야기하는 바 진보라는 것과 일반 서민들이 경험하는 진보 사이에는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자영업자들을 위해 그들이 뭔가 한 것이라도 있나? 도리어 맨날 이재명만 국가 빚을 내서라도 지원해야 된다며 정부와 여당과 싸웠다. 그렇게 미운 털이 박힌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된 이후에도 여당 내에서도 제대로 된 지지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겨우 받아냈다(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리베카 솔닛의 <<어둠 속의 희망>>은, 결과적으로 진보에 대한, 앞에 이야기한 지식인과 활동가들의 진보와 일반 서민 대중의 진보 사이의 괴리감을 보여주는 책들 중 한 권으로 읽혔다. 글들 하나 하나는 참 잘 쓰여져서 읽기 좋았지만, 솔닛이 말하는 어둠이 어떤 것인지 대강 알고 있지만, 구체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긴 그것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성격의 책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다소 패배주의적 감정에 물들어 있는 이들에게 낙담하긴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 책에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우아하고 명징한 문장들로 희망을 잃지 말자고 호소하고 있는.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이 나온 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읽히는 이유일 게다. 

리베카 솔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