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지하련 2022. 9. 10. 09:57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지음), 문학동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가끔 내가 작가의 길로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조금 끔찍해진다. 분명 문학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을 제대로 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작가가 되었다면 하는 생각을 요즘에도 잠시 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국내 작가가 쓴 책보다 외국 작가의 번역된 책을 읽게 된다. 어찌 되었건 이미 검증을 받은 이들일 가능성이 높고, 이런 이유로 한국어 번역까지 이루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된 책마저도 만족스럽지 못한 경우가 많으니, 국내 작가에 대해선 더욱 더 인색해진다. 

 

작년 겨울 교보문고 강남점에 갔다가 이 책을 우연히 보았다. 교보문고의 문학 담당 MD의 추천 코너에 이 책이 있는데, 표지도 그렇고 책 사이즈도 마음에 들었다. 손으로 집어 들었을 때의 무게감이랄까, 시야에 들어오는 표지의 존재감이랄까. 내가 이북을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음악도 마찬가지여서 좋은 음악을 듣게 되면, 음반부터 찾는다. 나는 디지털 세계랄까, 온라인 세계랄까, 이런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실제 물질 세계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디지털/온라인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산문집의 시작은 참 좋다. 도시 이야기는 참 시의적절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등장하면서 살짝 맥이 풀리는 느낌이랄까. 내가 기대했던 글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이들이다. 하긴 정지돈의 지인들이니 내가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은 이들 모두 문학 쪽에서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인데, 나는 알지 못했다. 오한기, 금정연, 이상우, ... 이렇게 처음 읽었을 땐 조금 읽다가 말았다. 그러다가 요 며칠 다시 읽었다. 도시, 서울, 파리, 벤야민, 산책, 산책자, ... 적절한 인용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마르그리뜨 뒤라스와 알렉산드르 헤몬이 나와서 좋았다. 신변잡기적인 듯하면서도 나름 문화비평적인 색깔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무거운 느낌도 아니고 가벼운 느낌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적절'이라는 단어를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읽으면서 요즘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건 한국적인 맥락이 아니라 세계적인 맥락 속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한국 작가의 양식은 아니다. 외국 작가들은 이런 식의 글을 자주 쓰는데, 한국 작가가 쓴 산문들 중에 이 산문집 같았던 책은 없었다. 여러 예술 작품을 언급하고 여러 사람들의 견해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다. 이것저것 관심가는 대로 읽고 습득하며 이것들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영화든 철학이든 사회학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이런 점이 좋았다. 그러나 최고의 산문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고의 산문집이란 뭘까. 글쎄다. 그게 뭘까. 

 

종이책이 현재의 코덱스codex 형태가 된 건 서기 4세기에서 5세기경이다. 그 전까지 종이는 왼손으로 받치고 오른손으로 펼치는 두루마리 형태의 볼루멘volumen이거나 위에서 아래로 펼치는 로툴루스rotulus였다. 조루주 아감벤은 볼루멘에서 코덱스로 전이되는 과정에 무언가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바로 페이지다. 볼루멘은 하나의 덩어리다. 그에 반해 코덱스는 불연속적이고 구분되는 단위들이다.볼루멘은 처음, 중간, 끝이 유기적으로 결합해있으며 지속성을 통해서만 모든 단위를 구현할 수 있다. 반면 코덱스는 글 한 쪽이 다른 쪽을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우리가 페이지를 넘기면 이전 페이지는 사라지고 새로운 페이지가 부상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책은 지금의 책이 되었다. (169쪽~170쪽) 

 

언젠가 어딘가에서 읽었을 내용이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조금 슬프긴 하다. 문학이라든가 예술이라든가 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몇 년이 된 것같으니.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반대로 내용으로 인해 새로운 형식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형식에 민감해져야 한다. 이건 장르의 해체같은 게 아니다. 

 

아래는 이 책에서 잠시 언급된 마이클 하이저(Michael Heizer)의 City라는 작품이다. 무려 50년동안 작업을 한 것이며, 며칠 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사막 한 가운데 작품 도시를 구축한 것이다. 좀 생뚱 맞은 대지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마이클 하이저, City
마이클 하이저, City

 

버지니아 울프는 <등대로>(1927)를 출간하고 번 돈으로 자동차를 샀다. (199쪽) 

 

1920년대 후반에는 소설을 출간하고 번 돈으로 자동차를 살 수 있었던 듯 싶다. 얼마전에 리뷰를 올렸던 러셀 자코비의 <<마지막 지식인>>에서는 대중을 위해 글을 쓰는 이들이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글을 쓸 수 있는 잡지들이 있었고 그 잡지들을 일반인들이 사서 읽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생계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지금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낮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하우저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퇴근 후에 쓴 책이다. 이 때는 이것이 가능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왜 불가능한지는 한 번 시도해보면 안다.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를 재미있게 읽었다. 추천할 만하다. 

 

정지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