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도 전개되는 양상이 비슷했다. 연로한 롤랑 바르트는 전통적인 지식인과 작가는 멸종하고 대부분이 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새로운 종이 그들을 대체하고 있다며 입버릇처럼 불평하곤 했다. 손택도 이런 묘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손택은 1980년 인터뷰에서 시대에 역행해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보편적인 역할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공표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다니엘 슈라이버, <<수잔 손택>>, 글항아리, 288쪽
러셀 저코비(자코비)의 <<마지막 지식인>>에서도 언급된 내용이다. 롤랑 바르트나 손택, 그리고 저코비가 이야기할 때의 그 지식인과 대학 교수는 일치하지 않는다. 신문기자를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듯이(한국에서는 경멸적으로 '기레기'라고 쓰고 '쓰레기'로 해석한다) 대학교수도 지식인이 아니다. 저코비의 책을 읽으면서 그 유명한 프레드릭 제임슨은 왜 일반 대중을 위한 글을 쓰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잠시 가졌다가 원래 인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기본 소양을 갖추어야 된다는 식으로 내 스스로 판단내렸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코비의 견해에 따르면 프레드릭 제임슨은 지식인이 아니다.
저코비의 책에선 수잔 손택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잔 손택이 리처드 세넷과 친구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수잔 손택 스스로 지식인으로 남고 싶었다는 점에서 다소 의외다. 다니엘 슈라이버의 책에선 미국에 지식인이 없었기 때문에 수잔 손택이 지식인으로 인정받았다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논평이 인용되기도 했지만. 하긴 한국 사정도 비슷해서 대학교수를 지식인으로 대접해야 할 지 의아스러운 요즘이다. 그냥 어려운 단어에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든 표현을 쓰면 된다는 식으로 글을 쓰는 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 지. 더구나 표절에 대해서도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일선 초등, 중고등 선생들, 신문기자들에 이어 대학교수들마저 변변찮은 월급쟁이로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졌다.
수잔 손택의 명성에 비해 한국에는 뒤늦게 알려졌다. 그녀의 책들 대부분은 그녀 사후에 번역되었다. 다니엘 슈라이버가 독일인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미국 작가이나, 평전은 독일인에 의해 씌여졌다는 건 그녀에 대한 평가가 고르지 않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수잔 손택의 책 몇 권을 읽었으나,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평론을 먼저 썼고 그 다음 소설, 영화로 작업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으며 평론집들도 몇 권만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을 뿐이다.
토요일, 히토 슈타이얼 전을 보고 왔다. 와우! 놀라웠다. 에너지가 넘쳤고 미디어를 기반으로 현 시대의 이슈들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문제제기하고 있었다. 슈타이얼에 대해서는 상당히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던 터라, 시간을 내어 국립현대미술관에 간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슈타이얼의 경우, 미술 작업와 평론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미술이 순수한 조소나 평면 회화를 벗어나 설치, 미디어, 비디오(영상작업) 그리고 글까지 하나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들은 흥미롭고 보는 이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나는 벌써 새로운 주제나 소재에 대해 둔해졌는데, 히토 슈타이얼은 그런 것들 찾아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 자신을 반성하게 하였다.
수잔 손택이 평론을 먼저 하지 않고 소설이나 영화를 먼저 하였다면,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확장하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랬으면 좀 더 달라졌을 지도 모를 텐데. 그나저나 경제의 측면에서는 일본을 닮아가고 지식인 사회는 미국을 닮아가니 한국의 미래가 계속 암울해지는 듯하다. 더구나 인구가 줄어드는 건 정말 큰 일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