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에피쿠로스 쾌락

지하련 2023. 1. 7. 08:56

 

 

에피쿠로스 쾌락

에피쿠로스(지음), 박문재(옮김), 현대지성

 

 

 

사람들로부터 받는 해악을 미움, 시기, 경멸에 따라 생기는데, 현자는 이성적으로 극복한다. (99쪽) 

 

 

고전 그리스가 끝나고 혼란스러운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시작된다. 알렉산더는 지금의 인도까지 내려갔다. 이 정복 활동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하였고 서로 다른 문화들이 섞였다. 안정되고 예측가능했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마을의 일상은 새로운 사람들과 문물들로 채워지고 내일은 알지 못하는 것이 되었으며 세계는 나와는 거리를 두며 서로 긴장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헬레니즘 시대 전반을 채우는 이러한 분위기를 예술의 역사에서는 고전주의 뒤에 이어지는 낭만주의적 시대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철학까지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 책 <<에피쿠로스 쾌락>>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뒤에 그리스 로마의 주류가 되는 철학이 바로 에피쿠로스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에피쿠로스주의는 서양 중세가 시작하는 시기까지 이어지다가 신플라톤주의와 합쳐져 중세 초기 교부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일반 독자에게 <<에피쿠로스 철학>>은 어떻게 읽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떠올랐던 이유는, 몇 천년이 지난 지금 읽으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대단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같기도 하고, 에피쿠로스는 이 글들을 쓰면서 제자들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일까를 선명하게 읽어내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또한 그리스에서 로마로 지중해의 헤게모니가 넘어가던 시기에 대한 사회역사적 배경을 알아야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그래서 인문학에는 천재가 없으며 그만큼 어렵다).

 

그런데 서양 역사나 지성사(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 이는 이 책 <<에피쿠로스 쾌락>>을 읽기 위한 전제라기 보다는 인문학 책들을 꾸준히 읽어나갈 수 있고, 그 책 읽기가 즐거워지기 위해서 기본적인 배경 지식이 있는 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급하게 서양 역사나 지성사를 익힐 필요 없다. <<에피쿠로스 철학>>을 읽으면서 우리는 헬레니즘 초기의 상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천히 알아나가면 된다. 대신 지성사나 철학사 한 두 권 정도 집에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로 '즐거움'으로 번역해도 되는 단어이고,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방탕한 쾌락은 참된 쾌락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으므로, 우리말에서 부정적인 어감을 보이는 "쾌락"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삼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가 행복을 쾌락(즐거움)과 연결한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170쪽)

 

'쾌락'이라는 대신 '즐거움'으로 옮겼더라면 에피쿠로스에 대한 많은 선입견이 사라졌을 것이다. 일종의 지적, 이성적, 논리적 접근을 통한 즐거움을 쾌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쾌락이라는 단어가 감각적인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역자도 책 뒤에 실린 <해제>에서 언급하고 있지만, 너무 오래 동안 '쾌락'으로 번역되어 왔기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 다른 철학 유파와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철학의 제일 목표가 행복을 얻는 것이며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먼저 고통의 주요한 원인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에피쿠로스주의에 따르면, 인생의 목표 혹은 최대의 행복이란 "육체적 고통과 마음의 동요가 부재한 상태(ataraxia)"이며, 철학은 영혼의 질병(즉, 마음의 불안과 동요)을 치유해서 건강한 자연적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다면 정신적 동요는 어째서 생겨나는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정신적 동요의 주요한 원인을 두 가지(신들에 대한 공포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제시했으며, 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정신적 동요와 두려움을 무지와 헛된 생각의 결과라고 간주했다. (<<서양고대철학2>>, 287쪽) 

 

어떤 문제(위기)가 있다고 치자. 대다수의 현대인들이라면 그 문제가 무엇 때문에 생겼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할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이런 태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제사를 지내는 이들이 있듯이, 그 때라면 더 심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한 시기에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에피쿠로스도 분명히 이야기한다. 알아야 된다고. 알아야만 우리 마음의 불안이 사라진다고.  

 

천둥이 생기는 이유는 바람이 구름 속 빈 공간에 갇히기 때문일 수도 있고(바람이 갇혀 있는 호리병에서 볼 수 있듯) 바람에 실려 불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 타오르면서 소리를 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구름이 찢어지고 분리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구름이 얼음처럼 응집되어 서로 부딪치고 파열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모든 천체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우리에게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87쪽)

 

이러한 논리적 추론에 대한 글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로는 거의 나오지 않다가  시대가 끝나고 르네상스 초기, 베이컨의 <<신기관>>과 같은 책에서 다시 언급된다.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의 대부분은 자연학에 대한 내용이다.  

 

우주는 물체와 허공이다. 물체들이 존재함은 감각 자체에 의해 어디서든 증명되고, 추론을 통해 불확실한 것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감각에 근거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허공, 공간, 감각으로 부르는, 인지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물들이 있을 공간도 없고, 우리에게 사물들은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움직일 공간도 없을 것이다. (47쪽) 

 

이러한 설명들 대부분은 하나하나 추론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요즘에서야 하나하나 실험을 하고 수학적 근거를 제시하였지만, 이 때만 해도 그것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니.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에피쿠로스는 요즘 기준으로도 일반적인 철학자가 아닌 셈이다. 

 

자연학을 탐구할 때는 근거 없는 전제들과 미리 정해놓은 법칙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현상들이 소리치는 것을 따라야한다. 우리는 소란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삶에 비이성적인 것과 근거 없는 생각을 비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77쪽) 

 

피토클레스여, 너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두라. 그렇게 해야만 많은 경우에 신화에서 벗어나, 여기서 말한 것과 비슷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117쪽) 

 

쾌락, 아니 즐거움,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지적인 수고로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 에피쿠로스는 틈만 나면 강조한다. 즐거움(쾌락)을 얻기 위해 철학한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수 있지만, 헬레니즘은 애초부터 그러한 시대였다. 전성기 로마가 실용적인 동시에 오락 중심적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일상에서의 행복 추구는 헬레니즘 전반을 물들이고 있던 어떤 기조였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을 향해 가는 과정을 에피쿠로스는 육체적, 물질적 방탕이 아닌 지적인 추론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몇 백년을 이어진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이 책 <<에피쿠로스 쾌락>>은 지금 얼마 남아있지 않은 에피쿠로스의 글들을 모았다. 에피쿠로스는 중세를 지나면서 그 가치가 폄하되었으며 제대로 된 이해를 받지 못했다. 확실히 반-종교적인 사상이니 말이다. 많은 저서들을 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몇 천년 전 안정적인 어떤 시대가 물러나고 혼란스러운 새로운 시대가 등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에피쿠로스라는 철학자는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두면 좋을 것같다. 결국 지적인 수고로움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요즘 말로 '책 좀 읽고 공부 좀 해라'라는 것이긴 하지만).  

 

사려깊고 아름다우며 정의로운 삶 없이는 쾌락의 삶도 없고, 쾌락의 삶 없이는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정의로운 삶도 없다. 예컨대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이지만 사려 깊지 않다면, 세 가지 중 어느 한가지라도 없는 삶은 쾌락의 삶이 아니다. (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