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지하련 2023. 3. 25. 14:23

 

 

 

아카이브 취향 Le Goût de l'archive

아를레트 파르주(지음), 김정아(옮김), 문학과지성사

 

그 순간의 삶을 설명하는 몇 마디의 말과 그 순간의 삶을 단 번에 우리 앞에 끌어내는 폭력 사이에
간신히 낀 채로 존재하는 삶들이다. (36쪽) 

 

 

작년 마지막 몇 달간 읽은 책이다. 짧고 단단하다. 역사가가 어떤 이들인지 제대로 알려주는 책이다.

 

역사가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기 이야기가 왜 진실한 지 그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 사람이다. 그러니 역사를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착각은 역사가 궁극적으로 진실을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착각이다. 역사는 세부적으로 검증가능한 진실 담론을 세우려고 하지 않는 어법, 정격(학문적으로 엄정한 형식)과 논증(진실성과 개연성을 기준으로 삼는 내용)이 결합된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법이다.(118쪽)

 

아무 의미없이 보관된 사료들 더미 속에서 역사가, 아카이브 작업자는 묵묵하게 그것들을 읽고 메모하며 해석해 나간다.

 

아카이브 작업자는 운집한 군중을 홀로 대면하는 개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군중에게 매료된 고독한 개인. 작업자는 내용의 위력을 예감하면서 동시에 해독의 불가능성, 원상 복구의 환상성을 예감한다. (23쪽)

 

파리가 파리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만들어지듯, 파리에 사는 사람들은 파리를 통해 만들어진다. 파리라는 도시에서 나타나는 사회성의 경향들은 파리라는 도시에 생긴 얽히고 설킨 길들과 비밀없는 공동주택들에 상응한다. (34쪽)

 

이 책이 가치있는 지점은 그 사료들, 아카이브 앞에서 그것을 읽어내는 사람들의 입장과 태도를 이야기하며 역사가란 어떤 이들인가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아카이브라는 아직 나지 않은 길에 들어서는 역사가는 동일화의 가능성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동일화indentification’란 자료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사건들, 생활방식들, 사고방식들 중에서 자기가 미래 세워놓은 가설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들에만 주목하는 경향을 말한다. (91쪽) 

 

역사는 결코 아카이브 베끼기가 아니다. 역사를 염두에 두면서 아카이브를 철거하는 것, 아카이브 앞에서 불안을 감추지 않는 것이 아카이브 취향이다. (95쪽)

 

아카이브는 주제별로 모여있는 파편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삶의 파편들, 다툼의 작은 조각들이 거기서 인간의 불행과 인간의 저항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99쪽)

 

아카이브에서 시작된 역사는, 그것의 서술과 표현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한국은 제대로 된 역사학을 가지지 못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된다. 가령 우리는 아직도 6.25 전쟁(한국전쟁)에 대한 제대로 된 인문학적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 2차 대전에 대한 책들은 참 많지만, 한국전쟁에 대해선 거의 없다. 이 참혹한 전쟁은 정말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 돌리기'에 익숙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일제 식민지에 대해서도, 광복과 전쟁 통에 일어났던 무수한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19세기 조선에 대해서 좀 더 과감하고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역사는 대립과 충돌의 결과를 공평하게 정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상호이질적인 논리들의 충돌 속에 드러나는 실재의 불균질함을 감당하는 일, 그것이 역사다. (106쪽) 

 

역사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감정적 차원을 계산할 줄 알아야 하고 비언어적 차원을 언어화할 줄 알아야 한다. 충돌은 역사가 생기는 장소다. 충돌한 뒤에 생겨난 것은 충돌하기 전에 있었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충돌은 ‘다른 곳ailleurs’에 길을 내고 새로운 ‘상태etat’를 창조하는 상처다. 그저 의례적인 충돌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사소하고 하찮은 충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역사가의 과제는 충돌이 나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 충돌은 성찰의 동력으로 삼는 것, 나아가 충돌이 동력이 되는 역사를 써내는 것이다. (60쪽)

 

아카이브 속에서 읽어내는 숨겨진 장면들 앞에서 저자는 하나하나 구체화시켜 나간다. 그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이 아카이브 연구자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단순한 역사, 안정적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카이브를 사회 관측 기구로 삼을 방법은 조각난 지식의 무질서함을 받아들이는 것, 불완전하게 재구성된 불명료한 사건들이라는 수수께끼를 마주하는 것뿐이다. (116쪽)

 

특별한 것들이 끊임없이 출현하는 아카이브는 작업자를 ‘독자성 l’unique’에 대한 성찰로, 개인이라는 역사적 개념에 대한 성찰로, 그리고 역사 속에 잠겨있는 무명씨들과 당대 사회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규명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로 이끈다. (113쪽)

 

아카이브는 동일자le meme, 타자l’autre, 그리고 양자의 차이le distinct를 끊임없이 출현시키면서 당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대립관계를 명확하게 만들 따름이다. (56쪽)

 

이 책은 역사 연구에 대한 상당히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역사학 전공자에게 추천한다. 그녀가 가장 깊은 영향을 받은 학자는 미셸 푸코다. 이 책에서도 자주 미셸 푸코가 인용된다.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아카이브를 연구하고 역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 이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이들을 늘어나는 요즘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형편없는 역사관을 가지고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이들을 갑자기 늘어난 현실은 참 절망적이다. 더 나아가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더 참혹해지기만 하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아를레트 파르주Arlette Farge(1941~)

 

“고백건대 이렇게 두 세기 반의 침묵을 건너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식들nouvelles’은 흔히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보다 내 몸 안의 세포들을 더 심하게 전율하게 했다. (…) 내가 이것들을 이용했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분명 이 삶들이 주는 전율, 자기를 강타한 문장들 속에서 재가 되어 남아 있는 이 먼지 같은 삶들이 느끼게 해주는 전율 때문일 것이다. - 미셸 푸코, “La vie des hommes infames”, cahiers de chemin, 1997  (43쪽) 

 

 

영어 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