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떤 아침 풍경

지하련 2023. 4. 26. 13:42

 

 

봄 바람이 차가웠다. 대기는 맑았다. 하늘은 높았다. 하얀 구름을 시샘하듯 파란 배경 위로 햇살이 떨어져 내렸다. 마치 내 마음은 알몸인 듯 추웠고 쓸쓸했으며, 비에 젖은 스폰지마냥 몸은 무겁고 피곤하고 지쳐있었다. 출근길은 길고 지루했으며 해야할 일들의 목록을 사랑의 주문을 외듯 되새기며 걸었다. 걷다가 살짝 삐져나온 보도블럭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그렇게 넘어져 다쳐 응급실에 실려가는 걸 잠시 상상하다가, 말았다. 불길한 상상은 현실이 되고 행복한 상상은 언제나 상상으로만 머물었다. 그랬다. 마치 우리 젊은 날들을 슬프게 수놓았던 사랑의 흔적들처럼. 

 

마치 공부하는 학생처럼 두꺼운 책 한 두권을 들고 다닌다. 오늘 들고 나온 책에 인용되었던 문장은 아래와 같았다.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은 타인의 지시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을 말한다. (......) '감히 알려고 하라! Sarera aude!'(......) '너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1784년 칸트는 <<질문에 대한 답변: 계몽주의란 무엇인가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arung?>>이라는 글을 통해 프로이센의 성직자 겸 관료 프리드리히 쵤러의 질문에 답한다. 그런데 한국의 상당수 사람들은 '계몽'되지 못한 채 조선으로부터 이어져온 신분, 조선인의 절반 이상이 노비였으므로, 그 노비 근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슬퍼졌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시대,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되었던 이들의 소박한 바람, 석양이 물들 때 이 소중한 노동을 끝내고 술 한 잔의 고마움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계몽된 이들에겐 미성숙의 노비(노예)가 끔찍해보일 지도 모르지만, 그 미성숙의 상태에만 머물러 대자적 계기를 경험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상태로만 있는, 그런 키취적 상태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읽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강조되었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어쩌면 조선 시대 대부분이 노비였던 우리 선조들에게 읽혀줘야 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 노비 선조들의 영향력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에는 조선인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는, 그래서 터무니없는 리더를 뽑곤 하는 우리들에게도 이야기해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자책하곤 한다. 쌓여있는 일들은 뒤로 한 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중앙아시아의 모래 먼지들이 씻겨내려간 아스팔트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행렬 위로 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문득 술 생각이 났다. 어제도 퇴근을 하고 집에 오니, 자정이 가까웠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피곤과 스트레스, 쓸쓸함과 외로움, 후회와 회한, 그러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어떤 바람들 위로 독한 알콜, 디오니오스가 관여하고 박커스의 무녀들이 노래했던, 오크빛깔, 혹은 자주빛깔의 알콜을 드리우면, 아주 짧은 순간만이라도 내 삶이 살짝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 사소한 바람, 너무 사소해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바람을 하고픈, 그런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