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지하련 2023. 5. 21. 15:22

 

 

 

세상의 끝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지음), 김용재(옮김), 봄날의책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몇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신한테는 내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아버지를 모시고 동물원에 가보면 짐승들은 더욱 짐승다웠어, 긴 몸통을 지닌 기린의 고독은 슬픈 걸리버의 고독과 유사했고, 동물 묘지의 묘석에서는 푸들 강아지가 괴로워서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어. 콜리제우 극장의 야외 통로 냄새가 나는 동물원은 노처녀 체육 선생 같은 타조와, 엄지발가락 건막류로 절뚝거리는 펭귄과,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처럼 한쪽으로 머리를 기울이고 있는 코카투 같은 이상한 새들로 가득 찬 새장 같았지. 게으르고 비대한 하마가 수조에서 느릿느릿 움직였고, 코브라는 부드러운 나선형 똥 무더기처럼 몸을 꼬고 있었고, 악어는 사형 선고를 받고 기다리는 도롱뇽처럼 신생대 제 3기에 살아남았던 운명에 힘들지 않게 순응하고 있었어. 동물 우리 사이에 서있는 플라터너스들은 우리 머리칼처럼 반백으로 변해하고 있어서 같이 늙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9쪽 ~ 10쪽)

 

그리고 포르투갈 식민지전쟁에 대해 찾아보았다. 1961년부터 1974년까지 포르투갈은 그들의 제국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니까 포르투갈 제국은 20세기 후반까지도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그 지역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들의 제국도 사라진다고 여겼다.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포르투갈령 인도 식민지 등에서 포르투갈 군인들은 전투를 치렀다, 각 지역의 독립 세력들과. 하지만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Antonio Lobo Antunes)에게 그 식민지전쟁은, 그저 끔찍했던 순간들의 연속일 뿐이었다. 30년 이상 이어진 살라자르의 독재로 나라는 피폐해져 있었다. 우민화정책이 대표적이었던 골통 우파 독재의 시절이었으며,  살라자르 이후 카에타누 정권이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민주화된 이후에서야 식민지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5년 후 이 소설은 출간된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비로서 그 시작이 이해되는, 기묘하고 우울한, 아름답고 슬픈, 어둡고 침침한 수렁 같은 절망으로 빨려 들어가, 사랑하는, 사랑했던, 사랑하고 싶은 이의 손을 붙잡으려 허공으로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모습들이 슬라이드 사진처럼 이어지는 이야기임을 깨닫게 된다. 아, 1979년 이 소설이 나왔을 때, 포르투갈 독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서늘했을까. 과거의 영광도 사라졌고 현재의 청춘들은 전쟁으로 망가졌으며, 미래의 포르투갈이 이제 없음을 깨닫았을 테니.

 

보드카 한 잔 더 할래? 난 아직 다 마시지 않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불안해지거든, 어쩌겠어, 6년 전 이야기인데도 아직도 불안해. 우리는 무리를 지어 모랫길을 따라 루주에서 세상의 끝인 루쿠스, 루앙깅가 강으로 내려갔어, 도로 건설 지역을 지키고 있는 부대를 지나쳤고, 동부지방의 보기 싫고 단조로운 사막과 조립식 막사 주변에 가시철조망을 두른 원주민 마을들도 지나쳤어, 무덤 같은 침묵이 내려앉은 식당들과 천천히 썩어가는 양철 판잣집들을 지나쳐 루안다에서 2,000킬로미터 떨어진 세상의 끝까지 내려갔어, 1월이 끝나가고 있었고 비가 내렸어,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어, 우리는 죽어가고 있었고 비가 내렸어, 비가 내렸어, 트럭 운전석, 바로 운전수 옆에 앉아, 나는 챙모자를 누까지 눌러쓰고 손에서 끊임없이 담배를 흔들어대며 고통스럽게 죽음을 배우기 시작했어.(51쪽)

 

소설의 원제는 ‘유다의 똥구멍Os Cus de Judas’은 ‘세상의 끝’, ‘머나먼 곳’이라는 포르투갈어의 관용적 표현이지만, 정말 ‘유다의 똥구멍’같은 참혹함과 절망이 소설 내내 이어진다. 그리고 결국엔 이 소설의 화자는 미쳐버린 건 아닐까 하다가,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 시간의 리스본은 환한 햇살에 축 늘어진 엉덩이와 젖무덤이 없이 평평한 유방이 그대로 보이고, 썰물이 빠져나가 매끄러운 자갈이 그대로 드러나는 누드 해변처럼 신비감이 사라진 도시 같아. 밤이 오면 삶에 지친 사무원이 쌓인 서류 다발 속에서 코 골며 누워 있는 공증 사무소 같은 집과 건물은 슬픈 가족묘로 변해버려, 문 안에는 짜증을 잘 내는 부부가 사소한 싸움은 잠시 잊은 채 줄무늬 잠옷을 입고 동상처럼 누워 있어, 그러다 침대 협탁의 자명종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회색빛 일상으로 미친 듯이 뛰어들어가. (151쪽)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중첩하며 끔찍했던 전쟁과 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던, 그렇게 강요당했던 분위기, 그리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상처 입고 피폐해진 지금을 이야기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 사이 먼 해외의 한 독자는 포르투갈의 과거와 현재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아냐, 진담이야. 행복도 후회도 없고, 이기심으로 만족하고, 위산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소화하는 것과 똑같은, 그런 행복이라는 막연한 상태가 내게는 슬프고 불안하고 침울한 계급에 내가 여전히 속해 있다는, 그러니까 순수, 정의, 명예, 즉 가족, 학교, 카톨릭 교회, 국가가 나를 좀 더 잘 길들이려고, 달리 표현하면 내가 항의하고 반발하고 싶은 욕망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진지하게 내게 강요한, 그런 깊고 위대하지만 결국에는 공허한 이상이라는 기적이라 폭발을 영원히 기다리는 그런 계급에 내가 계속 속해 있다는 느낌을 줘. (169쪽)

 

그러나 이 소설은 끝날 때까지 독자에게, 그리고 작중 화자에게도 사소한 희망이나 작은 위로도 만들지도, 전해주지도 못하고 끝난다. 

 

너에게 키스하게 해줘, 어떤 여자가 예전의 나를 닮은 슬픈 존재와, 배가 나오고 다리는 가느다랗고 긴 갈색 말총으로 덮인 텅 빈 고환을 가진 존재와 키스하고 싶을까? 다시 생각하니 불은 끄지 말아줘. (261쪽)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유를 지나, 스스로를 궁지로 내몰며 자학하는 단어들로 이어질 때,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어 나타날 때,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자아낸다. 이 소설은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래서 더욱 절망스러움을 극적으로 만든다. ‘포르투갈어가 지니고 있는 중어적 어미에, 정신과 의사라는 경험과 지식으로 인한 정확한 관찰, 이를 바탕으로 쓰인 긴 문장과 촘촘하게 짜인 문단은 안투네스의 ‘스타일’을 말할 때 늘 거론되는 특징이다. 단어가 겹겹이 쌓여 형성된 퇴적 구조같이 현기증을 일으키는 내러티브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의 주의와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혼란스럽게 뒤틀려진 문장과 단락 속에 독자는 파편화된 단어의 도움에만 의지하여 이를 헤쳐나가야 한다.’(역자의 해설 중에서)

 

아냐, 아침은 오지 않아,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지붕이 창백해지고, 얼음같이 차가운 빛이 새하얗게 블라인드를 밝히고, 잠자는 자궁에서 갑작스레 끄집어내어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무리를 지어 즐겁지 않은 일터로 가려고 버스 정류장에 모이기를 기대해봐야 아무 소용없어, 당신과 나는 두텁고 조밀하며 절망스럽고 출구와 피난처가 없는 끝없는 밤이라는 형벌을, 그러니까 탁한 위스키 빛깔을 통해 비스듬히 비쳐지는 번뇌의 미로인 밤이라는 형벌을 언도받았어 (187쪽)

 

우리가 바라는 아침은 오지 않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현대사도 만만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결국 고통스러운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과거가 고통스럽지 않았던 이들에겐 현재나 미래도 고통스럽지 않을 것이므로, 끊임없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우리의 태도를 기묘하고 낯설고 심지어 어리석게 볼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아침은 오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니, ‘과거를 잊자’라든가 ‘극복하자’는 말은 우리에겐 언제나 허위다. 과거를 잊을 수도, 극복할 수도 없으니. 

 

그리고 그 허위를 드러내는 순간,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거나 과거를 딪고 내일을 이야기하는 순간, 우리는 낙오자, 패배자, 잃어버린 자가 된다. 이 아이러니야 말로, 20세기 후반기를 살았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곤혹스러움이다. 이 소설 <<세상의 끝>>의 주인공도 그렇다. 그러니 이른 저녁 위스키 한 잔을 올려놓고 수다나 떨 뿐이다. 내가 이렇게 힘들었으니, 키스해 달라고 염치없이, 부끄러움 없이, 배려 없이 술에 취해 떠들 뿐이다. <<세상의 끝>>은 그런 소설이고, 그런 사람이 나오는 소설이다. 그래서 한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 .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녀는 이미 떠난 지 오래인데, 나는 빈 위스키 잔을 보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고, ... 그렇게 끊임없이 아름답고 슬픈 독백이 이어지는 소설이다.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 Antonio Lobo Antunes

 

* 포르투칼 식민지 전쟁에 대해서 :  나무위키 링크

 

* 1942년 리스본 출생인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는 전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이다. 해럴드 블룸은 그를 두고 살아있는, 가장 중요한 작가들 중 한 명이라고 하면서 조지 스타이너는 그를 콘래드와 포크너의 계승자라고 언급하였다. 그는 포르투칼 식민지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뒤 의사 대신 작가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현재 그는 현대 유럽 문학의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으며, 노벨 문학상은 주제 사라마구가 아니라 안토니우 로부 안투네스가 받아야 했다는 의견이 있는 작가이다.  <<The Land at the end of the world>>로 영역된 <<세상의 끝>>에 대해 안투네스는 최초에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고 <<The Paris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이야기한다. 전쟁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또한 자기에겐 무척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을 하늘을 보며 “I don’t know these stars. Where am I? What am I doing here?”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나 알제리 전쟁에 참전했던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아내나 아들에게 할 수 없었고 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너무 이상하고 비현실적이기에. 그래서 그는 전쟁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는 남자와 이야기를 듣는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더 나아가 남녀관계가 일종의 전쟁, 어쩌면 잔인하고 폭력적인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으며 아프리카에서의 사건들과 남녀 관계 이야기로 이루어진 대위법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소설 <<세상의 끝>>은 지옥에 대한 개인적인 비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