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제리 브로턴(지음), 윤은주(옮김), 고유서가
이 책은 옥스포드 대학의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한 권으로, 고유서가에서 한글로 번역해 출간하였다. 개인적으로 옥스포드 대학의 이 시리즈로 나온 <<예술사 Art History>>를 읽고 상당히 좋았는데, 이 시리즈가 번역되고 있었음을 이제서야 알았다. (예전엔 주위에 인문학 공부를 하거나 책을 좋아하던 이들이 꽤 있어서 새 책 소식이나 유명 학자들의 근황을 쉽게 알곤 했는데, ...)
르네상스에 대한 책들은 많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성과들까지 담은 책은 보기 드문데, 이 책은 그런 성과들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시사적이었다. 르네상스의 시기나 지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관점이 다르긴 하지만(나 또한 제리 브로턴이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동서양의 교류가 어떻게 르네상스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했다.
- 한스 홀바인, <대사들 Jean de Dinteville und Georges de Selve>, 1533
책의 서두부터 제리 브로턴은 '많은 사람들에게 한스 홀바인의 작품은 유럽 르네상스 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이미지다.' (9쪽)라고 언급한다. 실은 서양미술사를 공부했던 나로선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건 서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과 동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차이라 여겨졌다. 나에게 르네상스라고 하면 지오토의 그림이나 브루넬리스키의 돔, 라파엘로의 작품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어쩌면 저자인 제리 브로턴이 영국 사람이며 독일인이었으나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지내다 영국 런던에서 생을 마친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 ~ 1543)이 친숙해서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국내의 많은 서양미술사 책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단연코 도상학적 해석의 풍부함 때문이다. 책에서도 이 작품이 가진 그러한 의미를 수 페이지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다.
하단에는 두 권의 책(찬송가집과 상인의 산술책), 류트, 지구의, 플루트 케이스, 삼각자, 컴퍼스가 있다. 상단에는 천구의와 매우 전문적인 과학 장비들, 즉 사분의, 해시계, 토르퀘툼(시간과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장치)이 있다. (11쪽)
르네상스 교육의 기초 7개 교양 과목
3과(trvium) - 문법, 논리학, 수사학
4과(quadrivium) - 산술, 음악, 기하, 천문학
(예전엔 외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나지 않아 메모를 해두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음악이 있다는 것 정도. 이것은 그리스철학(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이다. 중세 시대에도 회화는 뒷전이었으나 음악은 그 추상적 체계로 인해 중세의 유비적 세계관에 들어맞는 양식으로 인정받았다)
왼편의 인물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궁정에 파견된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이다. 오른편 인물은 그의 가까운 친구인 조르주 드 셀브라는 라보르의 주교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건들은 정치와 종교 분야에서 이들의 위치가 인문주의적 지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되었다. 이 작품은 물건들이 표상하는 분야들에 대한 지식이 세속적인 야망과 출세에 핵심적이었음을 보여준다. (12쪽)
망가진 류트는 나란히 놓인 루터의 찬송가집과 카톨릭 십자가와 함께 홀바인이 형상화한 종교적 갈등의 상징이다. (13쪽)
그러나 보는 사람이 그림의 각도로 선다면, 이미지를 완벽하게 그려진 해골로 변신할 것이다. 이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예술가들이 사용했던 왜상화법이라고 알려진 첨단의 원근법 기술이었다. 예술사가들은 이것을 부와 권력과 학식이 한창일 때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으스스하게 만드는 것, 즉 허무(vanitas)의 이미지라고 해석한다. (18쪽)
작품에 대한 도상학적 접근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감동은 반감시킨다. 또한 일종의 해석학적 접근이라,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물건들이 각각 의미를,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체로 이 접근은 중세나 근대 일부 시대의 작품들에만 해당될 뿐이며, 더 나아가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막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제리 브로턴은 르네상스의 개념이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유럽적인 현상이며, 옛 비잔틴 제국에 속했던 오스만제국까지 포함하는 어떤 경향임을 알리고 싶어, 이 작품의 도상학적 해석으로 책을 시작한 것이다.
오스만인들과 그들의 동쪽으로 뻗은 영토는 르네상스의 문화적, 상업적, 정치적 풍경의 일부였다. (17쪽)
이러한 르네상스들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보다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르네상스와 겹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르네상스는 놀라울 정도로 국제적이며, 유동적이며, 이동성을 가진 현상이었다. (20쪽)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에 있다. 르네상스를 지극히 서유럽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하던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나 제리 브로턴은 동방의 여러 연구 성과들을 모아 르네상스를 입체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이러한 접근은 문화, 혹은 문명이 한 지역에 고립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한다는 귀중한 사실을 깨우치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알지만, 무척 피상적이다. 심지어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이시영 옮김, 학고재)가 절판된 지는 한참이 지났다. 굳이 읽을 필요는 없으나, 한 번 읽어본다면 왜 학자들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이 책을 언급하는지 알게 된다. 야곱 부르트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한길사)는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나, 이탈리아에 국한된 책이며, 폴 존슨의 <<르네상스>>(을유문화사)이 그나마 입체적으로 르네상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나, 이 책 또한 르네상스에 대해 편협한 시각으로 다루기는 마찬가지다. 더 나아가 '12세기 르네상스론'을 이야기하거나 북유럽 르네상스, 혹은 후기 고딕이나 국제 고딕을 언급한다면, 이는 일반적인 독자들이 알기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거니와 관련 책에서 읽기도 어렵다. 더 나아가 교황청이 있던 이탈리아 로마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그 이후 오스만제국의 이스탄불과 여러 측면에서 경쟁했다는 사실은 알기 어려운 내용이다. 이런 측면이 인문학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지만, 반대로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르네상스는 만들어진 개념이다. 역사에서의 시대 구분은 인식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위함이지, 실제로 그렇게 세상이 천지개벽하듯이 바뀌지 않는다. Rinasita(리나시타, 재탄생)는 16세기 고전 문화의 부활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였으며, 여기에서 유래한 르네상스(프랑스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가 처음 사용하였다. (* 쥘 미슐레의 <<프랑스사>> 7권에서 언급되었음)
(..) 세계의 발견과 인간의 발견. 16세기는(…) 콜럼버스로부터 코페르니쿠스에 이르는, 코페르니쿠스로부터 갈릴레이에 이르는, 지상의 발견으로부터 천상의 발견에 이르는 시기였다. 인간은 스스로를 재발견했다. (22쪽)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가 1860년도에 나왔으니, 19세기에서야 본격적으로 르네상스가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전 고대의 부활. 보다 넓은 세계의 발견. 종교적 불안정성의 확대가 ‘인간이 정신적으로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르크하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발전을 중세를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인 자의식의 결핍과 일부러 대조했다. (24쪽)
그리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 반도로 향해졌다. 르네상스는 문학/예술에 국한된 흐름이 아니라 자연과학, 철학, 정치도 함께 결부된 흐름이지만, 문화예술로 국한되어 해석되고 연구되었다.
르네상스는 근대 세계의 탄생지이며, 페트라르카나 알베르티,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만들어졌고 고전 문화의 부활이라는 특징을 가지며, 16세기 중반에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24쪽)
(…) 페이터는 르네상스 연구를 통해 ‘예술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을 향한 그의 신념을 설파하고자 했다. (26쪽)
19세기는 여러 모로 문제적 시대였다. 근대를 지나 드디어 세속화가 대중들의 삶을 지배하였으며 이제 종교의 색채는 거의 사라진 시대였다. 무신론이 휩쓸기 시작했으며, 신은 죽었다고 선언되었으며 인간마저도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되었다. 이 혁명의 시대에 르네상스는 새롭게 해석되었고 더 나아가 중세까지도 다시 읽혔다. 이 때 요한 하위징가(Johan Huizinga)는 <<중세의 가을 Herfsttij der Middeleeuwen>>이라는 책을 통해 북유럽 르네상스는 실은 중세의 마지막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중세’와 ‘르네상스’라는 부르크하르트식 시대 구분에 도전했다. 그에 따르면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라고 정의했던 양식과 태도는 사실 중세의 정신이 시들어가거나 쇠퇴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하위징가는 15세기 플랑드르 화가인 얀 반 에이크의 예를 들었다. (27쪽)
형태 면에서나 아이디어 면에서나 그것은 저물어가는 중세의 산물이었다. 몇몇 예술사가들이 예술 속에서 르네상스적인 요소들을 발견해왔다면, 이는 그들이 사실주의와 르네상스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 이제 자연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은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열망, 즉 이러한 세심한 사실주의사 소멸해가는 중세 정신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말해야 한다. - 하위징가(28쪽)
나는 하위징가의 의견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중세 철학이나 예술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양식 상 흐름과 북유럽 르네상스의 양식 상 흐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이 북유럽에서 먼저 일어난 것은 아직 그 곳은 세속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측면에서 중세의 가을이었다.
정신분석학, 인류학, 사회사의 성과물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그린 블랫은 16세기에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관한 자의식의 증대’가 목격된다고 주장했다. (31쪽)
* 스티븐 그린블랫, <<르네상스 시대의 자기연출: 토마스 모어에서 세익스피어까지 Renaissance Self-Fashioning: From More to Shakespeare>> (미번역됨)
'세속화'란 르네상스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들 중 하나다.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도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세속화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화'는 '자의식의 증대'와 궤를 같이 한다. (이걸 이야기하려면 한참 해야 하기 때문에 건너뛰기로 하자) 자의식의 증대는 셰익스피어를 지나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근현대 지성사를 살펴보면 흥미롭게 추적할 수 있다.
Gentile Bellini and Giovanni Bellini, Sermon of St Mark in Alexandria, 1504-07, Oil on canvas, 347x770cm, Pinacoteca di Brera, Milan
젠틸레 벨리니와 조반니 벨리니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설교하는 성 마르코>>
이 그림은 두 세계, 즉 고전세계와 15, 16세기 세계의 혼합물이다. 화가들은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모습과 성 마르코의 삶을 떠올리면서 베네치아와 15세기 후반 당대 알렉산드리아의 관계를 묘사하는데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42쪽)
르네상스는 고전 세계를 발굴하면서 동시에 동방 세계를 불러들인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학자들이 넘어와 고전 시대의 유산을 전파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지만, 그 당시 세상은 그렇게 닫혀 있지 않았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은 고전 시대의 로마 세계와 15세기 이탈리아를 잇는 최후의 연결고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콘스탄티노플이 고전 문화에 관한 많은 지식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줄 전달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는 초기 술탄 메흐메트의 공이 컸다. (52쪽)
도리어 제리 브로턴은 메흐메트 2세를 추켜 세운다. 그리고 유럽의 르네상스는 동서양의 교류와 경쟁으로 더 발전한다고 기술한다.
동방과 서방의 여러 국가와 제국 사이의 국제적인 경쟁이 르네상스 사상가들과 작가들, 예술가들을 자극했다. (54쪽)
이탈리아 예술가 코스탄초 데 모이시스(Costanzo de Moysis) 역시 메흐메트를 위해 일하러 이스탄불에 갔을 때, 페르시아와 오스만의 예술적 전통들을 바탕으로 그림과 소묘를 제작했다. (54쪽)
콘스탄초 데 모이시스의 <<앉아 있는 서기>>라는 작품으로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5세기, 페르시아 예술가 비흐자드Bihzad는 위 작품을 모사하여 아래 <튀르크 복장을 한 어느 화가의 초상>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1520년 등극한 술탄 술레이만 대제는 플랑드르 직조공들에게 대형 태피스트리를 주문했고, 1532년 빈 포위 때 쓸 황제의 금관과 보석을 베네치아 금세공업자에게 맡기기도 하였다. 이렇듯 르네상스는 고전 고대 시대의 발견과 세속화의 영향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빈번하고 지속적인 동방과의 교류를 통해서 더 풍성해졌다. 이 점에서 제리 브로턴의 이 책은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최신의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들의 삶의 방식이 크게 차이가 나고 지향하는 목표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보고 나는 철학자들은 연설가들과 항상 다르게 사고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연설가들의 노력은 군중의 갈채로 얻는 데 맞추어진 반면, 철학자들은 - 그들의 공언이 그릇되지 않는다면 - 자기 자신을 알고, 영혼을 본래적 상태로 되돌리고, 공허한 영광을 경멸하려고 애쓴다. (페트라르카, <고독한 삶에 관하여 De vita Solitaria> 중에서) (75쪽)
인문주의의 성공도 르네상스를 발전시킨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더 ‘인문주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고 사회생활에 마주치게 될 도덕적, 윤리적 문제들을 숙고할 수 있게 해 준다고 믿어졌으며, 특히 15세기 유럽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관료행정체계 속에서 서기관으로서의 미래 경력을 위한 필수적인 실용적 기술을 제공, 번역, 편지쓰기, 공정 연설 등 르네상스 사회 곳곳에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사회는 발전하고 세속화되었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세속적 경쟁이 시작되었고 자본주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였다. 1506년 4월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브라만테를 건축가로 지명하고 새로운 베드로 대성당의 주춧돌을 놓았다.
로마는 기독교 세계의 제왕적 수도 자리를 두고 콘스탄티노플과 겨누고 있었다. 이 경쟁은 1453년 술탄 메흐메트에게 도시가 함락되자 더욱 거세졌다. 로마와 교황들은 이스탄불과 술탄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117쪽)
하지만 이러한 경쟁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리라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 작업이 시작되고, 4년 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프레스코화 작업을 진행하던 1510년에 독일인 수사 마르틴 루터가 로마에 왔다. 이 때 목격했던 부패와 과시적인 소비 행태에 대한 환멸은 그가 카톨릭 교회의 권력 남용에 대해 공격을 가하도록 촉발한 자극제가 되었고, 이는 1517년 10월 면벌부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유포로 이어졌다. 그 해 3월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립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면벌부를 발행했다. 면벌부는 구매자에게 죄를 속죄하기 위해 받아야 할 벌을 감면해주는 교황문서다. (117쪽)
실은 면벌부뿐만 아니었을 것이다. 그레그 스타인메츠의 <<자본가의 탄생 The Life and Times of Jacob Fugger>>를 보면 그 당시 금융자본가들이 어떻게 종교권력과 세속권력 사이에서 자본을 키워나갔는가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성직자 자리도 돈으로 살 수 있었다. 이것을 부패한 종교 권력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빨랐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프레스코화는 1523 ~ 24년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이 바티칸에 그린 작품이다. 종교적 갈등이 최고 권력을 내용을 하는 정형화되고 공격적인 화풍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132쪽)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이 작품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Constitutum domini Constantini imperatoris'이라는 문서를 표현하고 있는데, 후에 이 문서가 4세기가 만들어진 문서가 아니라 8세기 경에 위조된 문서로 밝혀져 라파엘과 그의 제자들이 그린 이 작품의 가치마저 떨어졌다. 이 문서의 내용은 세속의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만큼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 간의 갈등과 경쟁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책 초반 동방과의 교류에 집중된 서술은 중후반부로는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다양한 영역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나에겐 다소 식상한 내용이었으나, 르네상스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하는 일반 독자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로 르네상스를 설명하는 것도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르네상스를 지나 근대로 이어지는 그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야말로 위대한 매너리즘 작가라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좀 유감스럽긴 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르네상스에 관한 설명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주제다. 왜냐하면 그의 문학은 남유럽과 지중해의 영향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고전적 인문주의 전통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끝을 의미하는, 보다 지역적이고 민족적인 주제에 대한 몰두로 옮겨가는 결정적인 이해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208쪽)
리뷰라기 보다는 요약문, 혹은 소개글 비슷한데, 그만큼 흥미진진한 독서를 선사해주었다. 고유서가에서 나온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소개하면 좋을 듯 싶다. 아, 그리고 이 책을 통해 한스 바론(Hans Baron)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기 The Crisis of the Early Italian Renaissance>>(1955)을 알게 되었는데, 아, 한글로 번역되었으나 바로 사라졌다. 이 책도 구해 읽을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도 서양사를 전공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필독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