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한국 사회에서의 리더, 혹은 신분제 사회

지하련 2024. 6. 5. 18:08

 

한국에선 대체로 마트 계산원들이 잘못된 계산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마트 관리자가 누구더라도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하는 단계에서 계산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서구에서는 마트 계산원들은 계산기에만 의존한다(고 들고 읽었다). 그래서 마트 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마트 관리자는 잘못된 계산을 찾고 그 원인을 분석한다. 대수롭지 않은 차이라고 여길 수 있고 조금 더 오해를 한다면, 그만큼 한국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것이 사회 시스템 전체로 확대되면 큰 문제가 된다. 일선 학교에 가서 큰 소리 치는 학부모들의 문제나 동장이나 시장, 심지어 대통령이 누가 되더라도 이 사회는 이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여기는 태도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심각한 건 정치 리더의 경우다.

 

한국에선 다들 자기들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정치 리더가 누가 되더라도 큰 위기를 겪지 않을 거야 라며 낙관하는 경우가 많거나 투표 등과 같은 정치 참여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으며, 더 나아가 리더에 대한 신뢰 형성 과정이나 검증에 상당히 소홀하다. 반대로 그렇다 보니, 한국 사회 특유의 관계주의 아래에서 비합리적인 믿음이 형성되기도 한다. 특히 유교적 사회 분위기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리더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을 상당히 조심하는 듯하다. 가령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이나 유배까지 간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가르치지만, 나라와 백성을 버리고 전쟁이 터지자 도망을 간 선조가 만주로 가서 만주의 제후가 되려고 했다는 사실을 역사 시간에 가르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선조의 아들들이 얼마나 많은 사건을 일으켰는지도 관심 있는 이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최근 경영, 혹은 경영학의 중요성으로 인해 조직의 리더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국 사회를 유심히 보면 과연 리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인지 가끔 의아스러운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적었듯이 서구사회에서는 리더와 기층 민중의 간격이나 구분이 명확하고 심지어 그것을 메우기 어려워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를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경제적인 영역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영역에서도 그 간격을 메우기 어렵다는 걸 지적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일종의 신분제 사회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 위해서. 그 연장선 상에서이런 면도 있다. 에릭 홈스봄의 <<극단의 시대>>에는 이런 서술이 있다. 

 

영국인들은 특히 상층계급에서 한 세대 - 50만명의 30세 이하 남성 - 를 잃었다. 문벌 좋은 남자로서, 모범을 보이는 장교가 될 운명이었던 상층 계급의 젊은이들은 자기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터로 나갔고, 그 결과 맨 먼저 쓰러졌다. 1914년에 영국군에 복부한 25세 미만의 옥스퍼드 대학생과 케임브리지 대학생 중 4분의 1이 전사했다.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43쪽(이용우 옮김, 까치) 

 

굳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말하지 않아도 된다. 유럽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상층 계급의 남자가 앞장을 서고 죽음을 당했다. 아직도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조선)은 확실히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리더, 혹은 리더십의 문화가 없는 이 땅에서, 안타깝게도 신분적, 경제적 격차와 구분이 서서히 명확해지고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는 수준을 향하고 있다. 또한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은 다르고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들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의 미래는 어둡다고 여긴다. 어쩌면 지금이 가장 빛났던 한 때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것에는 별 관심 있어 보이지 않는다. 정부가 R&D 예산을 삭감했을 때, 그것의 파급효과가 얼마나 크고 장기적인가에 대해 분석한 글을 읽은 바 없다. 현 정부에 비판적인 전문 저널에는 실렸을 지 모르나, 일간지 따위에는 실리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을 향해 손짓을 했다.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제임스 팔레 교수가 조선 사회를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노예 사회라고 지적했을 때, 국내 사학자들이 반발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제 얼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그런 자기 반성의 전통이 없는 것일 지도. 

 

 

퇴근 후 집에서 찍은 사진. 오랜 만에 좋은 노을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