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기원전 만 여년에 그려진 라스코 동굴의 벽화가 아직까지 감동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술사 최초의 '자연주의'양식이며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진정한 선조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전등을 켜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깊은 동굴에서, 그 어둠과 싸우며 감각에 충실하고 화려한 색채를 보여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싸운다'는 것의 의미. 현대 예술에서 '아방가르드(avant-garde)'라는 단어가 등장한 이유는 예술의 역사가 운명과 싸우고 현실과 싸우고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의 진실을 가르쳐주고 있기 위한 노력의 역사임을 현대 예술가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기술은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이 표현하고 있는 우리의 삶인 것이다.
앞으로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될 것인가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만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그 대답을 구할 수 있다. 경박한 영상들이 범람하고 스타는 제조되며 정치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아예 정치에 무관심해져 버리며 자신의 개성이라는 것도 자기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온통 소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뿐인 시대.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소비된 물품들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대.
최근 '몸학'이나 'body politics' 등의 반데카르트주의는 자기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인간의 소박한 소망이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 예술에 있어서도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마 전의 베이컨이 '일그러진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자한 바는 '육체'란 삶을 냉정하게 꾸려나가게 하는 차가운 이성에 적대적인 것, 그래서 버려야만 하는 흉칙한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즘 예술에서의 '육체'에 대한 생각이다. 하지만 반-모던적인 뒤샹의 <주어진Etant donn s>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기만적인가를 보여준다. 이브 클라인은 여러 '해프닝'들을 통해 우리 육체를 보다 직접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 또한 우리 육체의 움직임을 사각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차가운 이성의 계산 대신 뜨거운 육체의 분수같이 쏟아오르는 열정이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이 전적으로 감각으로 외부의 사물을 바라볼 때 캔버스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탈가치화', '탈중심화'이듯이 현대 예술이 보여주는 '육체'에 대한 집착은 서로 공유하고 싶어도 공유할 수 없는, 모나드(monad)처럼 각각 독립된 '육체'로만 존재하는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하나의 공통된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개개의 독립된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는 양식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이 예술의 역사상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규범이자 신념으로서 '고전주의'이 가장 확실하게 무너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신숭배(fetishism)'에 대한 경고를 아직까지도 듣고 있지만, 누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것인가? 지금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승리의 깃발 아래 있으며 돈은 우리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쟁취해야만 하는 그 무엇으로 된 지금, 누가 진정으로 한 개체의 진실에 대해 신경을 써주겠는가?
최근의 '몸(육체)'에 대한 관심이 뜬금없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리 삶의 진실과 허위에 대한 고민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들에게 가장 진실한 '육체'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의 끝은 허위적인 '사랑' 대신 진실한 '섹스'를, 구역질나는 '공동체적 가치'보다는 진실한 '개인적 가치'를,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로 곧장 달려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음 세기의 예술 양식이 어떤 모습일까는 답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번개와 천둥소리에 겁을 먹던 시대가 있었고, 하루 아침에 고전 시대의 문명을 잃어버린 암흑의 시대가 있었으니, 새로운 야만의 시대가 등장한다고 해서 인류의 역사,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낯선 것은 아닌 셈이다.
- 1999년에 중앙대 대학원 신문에 기고한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