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 빈곤과 청소년, 10년의 기록
강지나(지음), 돌베개
좋은 책이다. 가끔 한국 사회 내에서의 가난을 다루지만, 일회성으로 끝나고 만다. 일상 생활에서는 그런 모습을 피하고 마주할 기회가 없으며, 온전히 사회복지 관련 공무원나 활동가, 자원봉사자들에게 빈곤의 문제를 미루어 놓은 듯하다. 언론에서도 가난과 관련된 사건이 나왔을 때만 떠들 뿐, 사회적으로 어떤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어제 기사를 보니, 일부 기자들이 자신들은 직장인이기 이전에 언론인이라고 했다는데, 그런 말을 하지 말고 먼저 몸으로, 기사로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속적으로 언론의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몇몇 기사들은 사회 전반을 관통하며 주기적으로 환기시키며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받아쓰기나 인용만 하지 말고 제대로 임해주었으면 좋겠다.
빈곤에 대한 심층 기사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십 수년 전에 <한겨례21>이었나, 가난한 청년을 깊이 취재한 기사가 있었다. 그 당시 그 기사가 나에게 주었던 충격은 실로 대단했다. 모든 것이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청춘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었지만, 헤어날 수 없어 보였다. 그 때 나는 가난이 이 사회, 이 나라에서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가난한 집들이 많았다. 우리 집도 가난했다. 어렸을 때, 자주 날계란, 간장으로만 밥을 먹었고 부모와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도 괜찮은 편이었다. 고도성장기였고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과연 그것이 가능한 시기인가.
그러나 이 지금 세상에서도 어떻게든 건강하게 살아남아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가난한 청소년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겪어야 하는 고난과 어쩔 수 없이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고통, 두려움, 그리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일탈, 비행 등에 대해서는 평범하게 사는 우리들은 너무도 무관심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몇 천만원 씩 지원해가며 출산 장려 운동을 벌인다.
그렇게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병신같은 나라도 없다. 이미 태어나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아이들은 내팽개치고 새 아이들만 기다리는 꼬라지는 뭔가? 신생아 출산율 따위는 잠시 뒤로 미루고 정말 우리 사회가 빈부와 관계없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인지 진지하게 따져묻는 것이 먼저이지 않을까.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고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러니 국가가 나서야 하는 문제다. 일개 공무원이나 자원봉사자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빈곤 대물림에 대한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이십여 명의 청소년과 가족들을 만났다. 2016년 논문을 끝낸 후, 이들이 어른이 된 이후의 삶까지 계속 따라가는 책을 쓰기로 했고, 여럿명의 청소년이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혔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던 소희, 모범생 중의 모범생 영성, 에너지가 넘쳤던 지현, 빈곤 이후의 삶을 진솔하게 들려준 수정, 어두운 과거를 교훈삼아 일어선 현석, 여전히 홀로서기 중인 혜주, 이들을 3, 4년에 한 번씩 만나 세 차례 이상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연우와 우빈은 책을 구성할 때 '특성화고 현장실습과 진로'라는 주제를 추가하면서 2018년에 교사와 지역 사회 교육 전문가(구 학교사회복지사)의 추천을 받아 만났고 인터뷰를 두 차례 했다. 이렇게 총 여덟 명의 청(소)년의 이야기가 책에 담기게 되었다. (7쪽 ~ 8쪽)
저자는 움직이게 한 것은 아이들을 향한 사랑이고 미안함일 것이다. 결국 그 현장을 떠나지 못했고 빈곤과 싸우고 연구하며 빈곤 가정의 청소년들과 이야기하며 이 책을 만든다.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며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을 보며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경제학자로서 평생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연구해온 아마티아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빈곤은 단순히 재화의 부족이 아니라 자유로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려는 역량의 박탈이라고 설명했다. (38쪽)
아마티아 센은 경제 발전의 목적은 자유의 신장이며, 인간은 다양한 행위를 수행할 능력을 갖출 때 실질적인 자유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실제 인도에서 여성의 학력과 경제적 자유를 비교하여 빈곤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라고. 즉, 역량을 갖추기 위한 여러 지원 제도는 경제 발전을 이루는 시금석이 된다. 여기에서 보자면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금전적 지원도 필요하겠지만, 그것보다 개인의 역량을 지원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과제일 수도 있다. 개천에서 용 나오던 시대가 지났다가 아니라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제도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아마티아 센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왜 하지 않는 걸까.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가족>>은 아빠-엄마-자녀들로 이뤄진 가족만이 '정상'이라고 보는 프레임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정상가족 프레임은 이 프레임 밖에 있는 비정상가족을 모두 소외시키며, 여기에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가족 프레임은 한국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모든 문화와 정책의 기본 단위가 되고 어떤 바람직한 삶의 표상이 된다. 이 때문에 중산층은 부와 권력을 세습시켜 안전한 '정상가족'을 자녀세대도 이어가길 바란다. 자녀들에게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갖은 노력을 다 요구하는데 이는 '우리 집, 우리 애만 잘되면 된다'라는 가족이기주의를 만든다. 정상가족은 사회문화적으로도 강력한 밈이 되어있다. '또 하나의 가족'과 같은 상품 브랜드, '가족같은 분위기'에서 운영되는 회사라는 말이 긍정적인 의미로 통용된다. 마치 '가족'같은 관계가 되면 모든 갈등이 녹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은유한다. 일종의 가족 지상주의라는 환상을 퍼뜨리는 것인데, 이는 그 관계 안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조직사회에서 가장 약자에게 행하는 착취를 은폐한다. (62쪽 ~ 63쪽)
수정처럼 가난한 환경에 놓인 청소년들은 본인이 취업을 했더라도 그 환경에서 온전히 벗어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자식의 부모 돌봄이라는 효를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고,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개인에게 지우는 가족 중심 문화가 강력하다. 성년이 된 청년은 독립적인 개인이기보다는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을 더 크게 부여받는다. 성인이 된 후에 하는 연애, 공부, 취업에 가족이 깊이 개입한다. (143쪽)
'정상가족'의 개념은 상당히 시사적이었다. 이 책에 등장한 아이들도 그렇지만, 대부분 가난한 가정은 정상 가족의 범위 안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가족의 구성부터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하는 셈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모자란 편견인가. 그러나 그런 (비정상적인) 가족마저 의지할 곳이면서 동시에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을 착취하는 곳이었다. 그 가난한 아이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을 이야기한 이 책이 감동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지금껏 만난 청소년들 중에 지현만큼 극적으로 살아온 사람은 없었다. 지현의 가정환경이나 살아온 여정도 기구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는 더 경이로웠고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나라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저런 일념으로 살아올 수 있을까 싶은 강인함이 있었다. (92쪽)
누군가는 견디며 살아남고 성장하고 가치를 만들어 나간다. 외부 탓을 하지 않고 어려운 환경과 싸우며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 앞에서 우리는 미안함과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나는 이를 '성찰하는 힘'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수많은 청소년 인터뷰이 중에서 성공적으로 가난에서 벗어난 친구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점이다. 성찰하는 힘은 인간이 사회적,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외적인 지식(예를 들어, 학력)과 외형적 모습(예를 들어, 재산, 직장)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하면서 자신을 돌보고 스스로 자기 욕망과 사회적 위치를 사고하고 판단하는 내면적 성숙도, 즉 성찰하는 힘에 대해서는 참 소홀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우리의 교육 체계는 청소년에게 이 성찰하는 힘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교육 과정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97쪽)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철부지같은 주장인지 다 아는 이야기다. 더 괴상한 것은 마르크스가 영향을 받은 헤겔의 역사관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이야기했고 여기에 많은 지식인들이 열광한 풍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기괴한 풍경이다. 그런 거대 담론 앞에서 우리의, 이 비루한 삶의 풍경은 어쩌란 말인가.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작은 실천들이 더 의미있는 시기다. 작은 실천들이 의미있는 성과를 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학교 선생님의 역할이 정말 크다고 여긴다. 이 책의 저자인 강지나도 학교 선생님일 때, 가난한 아이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까지 이르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학교 선생님이 예전같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학교 선생님이다. 학교 선생님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의 방황은 방치하면서, 비행을 저지른 아이들에 대한 교정 시스템은 매우 부실한 편이다. 단적인 예로 '청소년 보호관찰'을 들 수 있다. (...) 교정 시스템은 이렇게 부실하면서 청소년 범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매우 과장되어 있다. 청소년 범죄에 대한 논의 중 가장 뜨거운 것은 촉법 소년 연령 문제를 포함한 소년법 개정이다. (190쪽)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사교육과 입시 정보 등으로 대표되는 가족의 뒷받침 없이는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곳이 되어버렸다. 빈곤층 청소년들은 취약한 가족 자원 때문에 학교에 의존해야 하는데, 학교가 가족 배경 없이는 성공하기 힘든, '사다리를 걷어차는' 제도인 셈이다. 영성은 아르바이트와 대학 공부를 병행하면서 좋은 학점을 받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얘기했다. 수정도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에서 수업을 받으며 동시에 실습에 나갈 수 없었고, 경력 면에서 부족한 스펙을 갖추고 취업 전선에 나가야 했다. 빈곤층 청소년들은 이 구조 하에서 '계층 지위의 확인'과 '끊임없는 실패'를 경험하고 어느덧 학력 경쟁에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266쪽)
예전 살던 집으로 가던 오르막엔 유명한 고아원이 하나 있었다. 예전엔 연예인들도 자주 와서 봉사를 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 곳을 나와야 한다. 몇 년 전 들었던 걸로는 500만원을 지원한다고. 지금은 조금 더 올랐을 지도 모르겠다. 그 돈으로는 대학 학비도 내지 못한다. 일이년 버티다가 죽으려고 시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만 비관하기 바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세상의 관심이 좀 더 아래로 흘러야 된다고 믿는다. 그런 측면에서도 이 책이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