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의 길 The Road to Serfdom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지음), 김이석(옮김), 자유기업원
작년 말부터 재개한 독서모임에서 20세기 초반을 중심으로 책을 읽어나가고 있다.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읽은 후 케인즈 평전을 읽었고 케인즈와 대척점이라고 알려진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까지 온 것이다. 대척점은 무슨 대척점. 솔직히 형편없는 책이다. 경제학자가 쓴 정치학 책이라면 차라리 앨버트 O. 허시먼의 책들이 훨씬 뛰어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선정해서 읽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좌우대립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이에크는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동일선상에서 파악하고 있으며, 사회주의가 새로운 형태의 파시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이에크는 경제학자이기는 하나, 이 책은 경제학 책이 아니라 정치학 책이다. 그것도 사회주의 계획 경제을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다. 따라서 지금 읽으면 다소 터무니없고 일방적이며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고전'이라고 하며 읽기에는 기운 빠지는 일이다. 그 정도로 형편 없었다. 또한 케인스와 대립되는 거장으로 이해되곤 하지만, 케인스와 비교하는 것도 다소 무리이지 않나 싶다. 케인스는 경제학의 시대를 연 학자이며, 경제 정책이 한 나라의 재정 뿐만 아니라 세계 경기 흐름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학자이지만, 하이에크는 그 정도의 학자는 아니다. 결국 케인스의 주장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금융 자본가들이 선택한 경제학자로, 정치적인 의도로 케인스의 대결 구도를 일부러 조장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해 보인다. 이는 밀턴 프리드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거의 공포에 가까운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이 당시 보수주의자들이 어느 정도로 사회주의를 싫어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의 매카시즘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는 해방 후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좌우 대립은 사상적 대결이 아닌 일종의 공포나 두려움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과격한 것이었으며, 러시아는 이를 조직화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왔던 이 책은, 파시즘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그 고통이 재현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들에게 사회주의란 의도적으로 사회를 위계적 방식으로 재조직화고 강압적 '정신력'을 강제함으로 프랑스 혁명을 말살하려는 하나의 시도를 의미했다.(62쪽)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 아래의 조건들이 여러 측면에서 너무나도 유사하다는 데 관찰자들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65쪽)
전체적으로 체계적인 책도 아니고 문장이 탁월하지도 않고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강하다. 굳이 사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제대로 된 보수주의자가 되려면 차라리 칼 포퍼의 책들이 좋겠다. 적어도 자신의 주장을 보수적인 견지에서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그래서 극우나 앞뒤 꽉 막힌 우파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편은 칼 포퍼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극우와 골통 우파가 칼 포퍼를 읽을 수나 있을 지 모르겠구나. 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많은 젊은이들이 죽은 그 처참한 사태를 두고 음모론을 이야기하다니, 참혹하기만 했다. 저런 이를 대통령으로 지지한 국민들은 지금라도 나서서 자신의 투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할 것이다. 늘 이야기하지만, 한 나라의 리더의 수준이 딱 그 나라 국민의 수준임을 잊지 말자.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아래 글은 과격하게 하이에크의 경제학을 비난하고 있다. 이 정도로 혹독하게 비판을 받을 수 있음도 기억해두자. 베를린에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에 근무하는 연구원의 글이긴 하지만.
https://jacobin.com/2024/05/friedrich-von-hayek-freedom-neoliberalism-democracy
* <<노예의 길>>이라는 번역 제목보다 <<예속의 길>>이라는 예전 번역 제목이 적절해 보이다. serfdom라는 단어에는 종속됨, 농노라는 뜻이지, 노예Slave의 뜻이 아니다. 삐닥하게 보자면, 악의적인 번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근에 읽은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헬레나 로젠블렛, 니케북스)에 하이에크와 관련된 설명이 있어, 길게 인용한다. 실은 하이에크가 지속적으로 '자유주의'를 언급하는 바람에 읽게 된 책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하이에크는 과대 평가된 경제학자이며, 편견으로 가득찬 한 유파에서 과하게 띄운 이가 아닐까 싶다.
1927년에 저명한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저서 <<자유주의Liberalismus>>에서 자유주의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 대해 한탄했다.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는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목적이든 간에 인도주의적 목적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사람들의 물질적인 후생을 증대시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의 핵심 개념 사유재산, 개인의 자유, 평화였고 이것 이상의 것을 추구하면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미제스는 사회주의를 경멸했다. 미제스는 만약에 어떤 자유주의자가 인본주의와 너그러움을 이야기하면 그는 '유사 자유주의자'라고 언급했다. (369쪽)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로 미제스의 제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배버리지와 루스벨트가 자유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맹렬히 반대했다. 1931년에 런던 정경대학에 부임한 하이에크는 루스벨트 방식의 자유주의와 뉴딜New Deal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럽에서 정치가 펼쳐지는 양상에 경악한 하이에크는 만약 어느 나라가 "집합적 실험"을 시작하면 그 나라는 곧 파시즘으로 미끄러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옛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말하는 옛 자유주의란 정부 불개입을 의미했는데, 점차로 그는 이 관점을 더 강하고 근본주의적인 형태로 주장하게 된다. (3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