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기억 서사, 오카 마리

지하련 2024. 11. 4. 23:18

 

 

기억 서사

오카 마리(지음), 김병구(옮김), 교유서가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비난하지만, 이스라엘 안에서도 전쟁을 하는 자신의 나라를 비난하고 그러지 말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주류 언론에선 그들을 다루지 않는다. 이는 일본도 비슷하다. 중국은 죽거나 추방당했다. 사람들은, 한국이나 일본, 영국이나 프랑스에 살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문화적 배경이나 지역적 차이와 무관하게) 대체로 자주 듣고 읽게 되는 것으로 편향되기 마련이다. 일종의 반복 학습이랄까, 그래서 아무리 사실을 그대로 옮기더라도 한 번 편향된 시선을 가지면  아래선 대부분의 것들은 잘못 이해되고 그것으로 인해 끔찍한 비극이 생기기도 한다(이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로 정의한 바 있다). 어쩌면 아우슈비츠도 그런 기원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유대인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져 고착화된 탓에(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왜 그런 걸까). 

 

이 책이 그런 기원을 묻는 건 아니지만, 어떤 편향을 거부하며 서사의 왜곡마저 부정하며 '사건'으로 공유되길 바란다. 그것은 생생하게 존재하며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되살아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 신체에 습격해 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건은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현재를 살아간다. 그렇다면 기억의 회귀란 근원적인 폭력성을 숨기고 있는 것이 된다. (29쪽) 

 

트라우마 같은 걸까. 잊고 지내던 것이 불현듯 떠오를 때, 그것이 반갑거나 또는 고통스럽거나 슬플 것이다.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 지금은 사라진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집 마당 풍경같은 걸까.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억압된 기억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그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건의 현실, '리얼리티'란 바로 리얼하게 재현된 '현실'로부터 넘쳐흘러 간 곳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스필버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55쪽) 

 

스필버그에게는 완결된 서사만이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 실제 삶에서 마주하며 부딪히고 싸우는 서사는 완결적이지 않다. 심지어 그 일이 왜 나에게 닥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그것과 싸운다. 그래서 현실의 부조리함은 완결된 서사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스필버그 영화에서 의미 있는 것은 그 현실의 부조리함마저도 가두는 완결된 서사다. 

 

서사가 부인하는 것은 전쟁이란 사람을 부조리하게 죽게 만드는 '사건'이라는 사실, 주체적인 선택이 근원적으로 부정되는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68쪽) 

 

오카 마리는 이를 두고 '서사의 기만, 기만의 서사(72쪽)'라 칭하며 '사건을 완결된 서사로 리얼하게 재현하고 싶어하는 스필버그의 욕망은 타자가 당한 폭력을 부인하고 망각하는 것이며, 그의 내셔널한 경험, 내셔널한 욕망과 분리하기 어렵게 연관되어 있다(85쪽)'고 지적하지만, 아마 대부분 관심없을 것이다. 

 

결국 서사로는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어찌 제대로 된(완결된) 서사로 현실의, 그 사건의, 참혹한 기억의 부조리함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기억은 타자에게 말한다는 행위, 더욱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을 사람에게 말한다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는 공교롭게도 그들의 이야기가 입증된다. 다만 사건의 기억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타자에게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건의 리얼리티가 타자에게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기억을 말한다는 것, 더욱이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기억을 타자에게 말한다는 행위가 이처럼 타자가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절실한 생각으로 가득하고, 사람의 말이 이토록 믿기지 않는 듯한 불안한 빛으로 물들여져 있다는 것이 이야기 곳곳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나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98쪽) 

 

저자는 '서사'를 부정하며 '사건'과 그 사건의 '기억'을 공유하라고 말한다. 그 '사건'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그것과 싸우기를 권한다. 그것은 공유되면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반복되는 현재가 된다. 일본군 위안부부터 팔레스타인 난민에 이르기까지, 이 책에선 반복적으로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청한다.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된다. 집단적 기억, 역사의 언설을 구성하는 이는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사람들, 곧 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그 자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사건'을 없었던 일로 되어버린다.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어버린다. 그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존재는 타자의 기억 저편, '세계'의 외부로 밀려나 역사에서 잊힌다. (111쪽) 

 

’사건’에 대한 기억의 흔적. 우리 곁에 남은 것은 기억의 흔적, ’사건’의 흔적뿐이다. ’사건’이 그 자체의 기억을 말한 흔적. ’사건’의 나누어 갖기를 내건 말하기란 그 흔적으로 하여금 ’사건’의 기억을 이 세상으로 다시 한번 소환하는 바로 그와 같은 말하기는 아닐까. (135쪽) 

 

장 주네Jean Genet는 1982년 베이루트 인근에 있었다. 그는 샤틸라Chatila에서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고 난 다음, 20년 동안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있다가 그 곳에 있었던 네 시간을 기록하였다. <<샤틸라에서의 4시간>>은 장 주네의 마지막 글이 되었다. 오카 마리는 사건이 어떻게 기록되고 공유되는가를 장 주네를 통해 이야기한다.

 

증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순수한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다. 역사를 결정하는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견뎌내고 있는 이 낮은 곳에 몸을 두는 것. 낮게, 그것도 철저히 낮게. 수동성이라는 말이 이미 허튼소리가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되는 것과 같은 바로 그런 낮은 곳에 몸을 두는 것. 
낮게, 어디까지나 낮은 곳. 그곳에 주네가 있다. ...... - 르네 셰러, <<환대의 유토피아>> (재인용, 137쪽)

 

‘난민’-’사건’을 내셔널한 역사/서사로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사람들. 인간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인간을 영유하는 그런 ’사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건’의 기억을 ’서사’로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영유하는 것은 바로 이 난민적 삶을 사는 사람들뿐이다.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우리가 ’난민’에게 생성하는 것, 즉 난민적 삶을 살아가는 것 속에 있다. 
무엇보다 ’난민’이 되는 것, 이와 같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장소로서의 조국,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국을 향해 그곳으로의 귀환을 타자와 함께 꿈꾸는 난민이 되는 것이다. (153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너무 아프다. 실은 조국, 국가마저도 부정당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쩌면 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민주(주의)화에 성공해서 그럴 지도 모른다. 여성이면서 일본인이며 아랍 문학 전공자인 오카 마리의 이 책은 서사가 가지는 기만성을 성공적으로 폭로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 그 일상 대부분을 공유하는 일반 대중에게는 가닿지 못한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내가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편향된 채로 살아가다 죽을 것이다. 내가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절반 이상의 사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것도 이와 비슷하다. 아마 그들 대부분은 다시 대통령 선거를 하더라도 동일한 결론에 이를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사고나 시각을 바꿀 생각도, 의지도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까진 없다. 애초 역사란 그런 것이다. 운명이란 그런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신탁(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신탁을 벗어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인간으로서의 고귀함을 잃지 않았다. 거친 아티카 반도의 작은 도시 아테네에서 태어난 플라톤을 그 반도를 뛰어넘어 영원한 이상향을 꿈꾸었고, 그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들, 사상가들, 과학자들은 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니 우리들 중 누군가는 끝없이 아직 실현되지 않은 조국을 향해 꿈꾸는 난민이 되었거나 되고 있거나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만적인 서사를 넘어 사건을 공유하며 나은 내일을 실현해나갈 것이다.  

 

* 이 책에선 여러 작품들이 인용된다. <<하이파에 돌아와서>>라든가. 그 중에서 장 주네의 <<샤틸라에서의 4시간>>이 궁금해졌다. 아래는 검색을 통해 찾은 자료들이다.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저 때는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이 물러났지만, 지금은 ... 실은 그 때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이다. ... .... 

 


* 장 주네, <<샤틸라에서의 4시간>>(영어 번역) https://www.palquest.org/sites/default/files/Four_Hours_in_Shatila-Jean_Genet.pdf

* 영화 <<Genet 'a Chatila>>(1999) : <<샤틸라에서의 4시간>>을 쓴 장 주네의 흔적을 찾아 가는 다큐멘터리 필름. 아래 영화다. 불어인데, 자동 영어 번역으로 보면 대강 이해할 수 있긴 하다. ;;;; 

https://www.youtube.com/watch?v=-1K-d__FBHY 

 

*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B8%8C%EB%9D%BC-%EC%83%A4%ED%8B%B8%EB%9D%BC_%ED%95%99%EC%82%B4  

 

오카 마리(岡真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