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

지하련 2025. 3. 15. 07:38

 

 

 

에어리얼

실비아 플라스(지음), 진은영(옮김), 엘리 

 

 

오래 전에 사둔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읽다 그만 둔 채 서가에서 먼지만 먹고 있는데, 나는 최근에 실비아 플라스의 유고 시집인 <<에어리얼>>을 읽었다. 그리고 후회했다.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젊었을 때만큼 힘든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통스러움이 언어들 속에서 묻어나와, 시인 테드 휴즈를 미워하게 되었다. 

 

시집에서 세 편을 옮긴다. 최고의 시는 역시 <달과 주목나무>다. 영어로 읽기를 권한다. 문학 작품에 대한 번역은 한 단어 한 단어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영역으로 옮겨지는 것이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시인 진은영의 번역이 상당히 좋긴 하지만. 

 


불모의 여인


텅 비어 있어, 나는 가장 작은 밠소리에도 울린다.
기둥들, 주랑 주랑 현과들, 둥근 천장의 홀들로 웅장하지만, 조각상이 없는 박물관처럼.
나의 안뜰에서는 분수가 솟아올랐다 제자리로 떨어진다, 
수녀같은 마음으로, 세상일에 깜깜한 채. 대리석 백합들이 
자신의 창백함을 향기처럼 발산한다. 

나는 위대한 민중과 함께한다고 상상한다,
하얀 니케와 눈이 밋밋한 몇몇 아폴로들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죽은 자들이 관심으로 나를 상처 입힌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달이 내 이마에 손을 얹는다,
간호사처럼 무표정하고 말없이. 

 

 

튤립 


튤립들은 너무 흥분을 잘하고, 여기는 겨울입니다.
보세요, 모든 것이 얼마나 하얗고, 조용하고,눈 속에 갇혀 있는지.
나는 조용히 혼자 누워, 평화로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빛이 이 흰 벽들, 이 침대, 이 두 손에 드러워져 있거든요.
나는 아무도 아닙니다: 나는 폭발들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내 이름과 입고 온 옷은 간호사에게 내주었고
내 병력은 마취과 의사에게, 내 몸은 외과 의사에게 내주었어요. 

그들은 내 머리를 베개와 시트의 덧단 사이에 받쳐놓았죠
닫히지 않을 두 개의 흰 눈꺼풀 사이에 있는 눈처럼 말이에요.
멍청한 눈동자, 모든 것을 담아둬야 한다니.
간호사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갑니다, 그들이 문제가 되진 않아요,
그들은 흰 캡을 쓰고 갈매기들이 내륙을 지나가듯 지나가죠,
손으로는 일을 하면서, 이 간호사나 저 간호사나 똑같이,
그래서 얼마나 많이 있는지 말해드릴 수 없겠네요. 

내 몸은 그들에겐 조약돌, 그들은 내 몸을 보살펴본디. 물이 
조약돌들 위로 흘러넘치며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그들은 빛나는 주삿바늘로 나를 마비시키고, 나를 잠재웁니다.
지금 나는 길을 잃었고 짐 가방이라면 신물이 나요 ---
에나멜가죽의 내 작은 여행 가방은 검은 알약통 같고,
남편과 아이는 가족사진 속에서 웃고 있어요;
그 미소가 내 살에 박힙니다. 미소 짓는 작은 낚싯바늘처럼 

나는 모든 것을 놓아주었어요, 서른 살 된 화물선이
고집스럽게 내 이름과 주소를 붙들고 있군요.
그들은 나와 정답게 얽혀 잇는 것들을 깨끗이 닦어냈어요.
겁에 질린 채 알몸으로 초록색 플라스틱 베개가 달린 운반용 침대에 누워
나는 보았어요, 내 찻잔 세트와 내 속옷 장과 내 책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그리고 물이 내 머리 위로 차올랐죠
나는 이제 수녀입니다, 이렇게까지 순결했던 적은 없었어요. 

어떤 꽃도 필요 없었어요, 내가 다만 원한 건
두 손을 위로 향하게 한 채 누워서 완전히 비워지는 것.
얼마나 자유로운지, 당신은 모를 거야. 얼마나 자유로운지 ---
평화로움이 너무 커서 당신을 멍하게 할 정도이고요.
그것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이름표 하나, 시시한 장신구 몇 개.
그것은 죽은 자들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죠. 결국; 나는 상상핮니다
그들이 평화로움을 성찬식 알약처럼. 입에 넣고 다무는 모습을.

튤립들은 무엇보다도 너무 빨갛죠, 내게 상처를 줘요.
포장지 사이로도 그들이 숨 쉬는 걸 들을 수 있어요. 
무시무시한 아기처럼, 흰 강보 사이로, 가볍게.
그들의 빨간색이 내 상처에 말을 걸어요. 상처는 호응합니다. 
그들은 묘합니다: 떠다니는 듯 보이지만, 나를 짓누릅니다.
느닷없이 내민 혀들과 색깔로 나를 뒤흔들며.
내 목둘레에는 빨간 납으로 된 열 두 개. 

이전엔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주시당하고 있습니다.
듈립들이 내게로 고개를 돌려요. 내 뒤의 창문도요
거기선 하루에 한 번 햇빛이 천천히 넓어졌다가 천천히 가늘어집니다.
그리고 나는 태양의 눈과 튤립들의 눈 사이에 나 자신을 봅니다.
밋밋하고, 우스꽝스럽, 오려놓은 종이 그림자 같은 나를,  
그리고 나는 얼굴이 없어요,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싶었어요.
생생한 튤립들이 내 산소를 먹어치웁니다. 

그들이 오기 전 공기는 무척 고요했어요.
법석 떨지 않고, 숨결을 따라, 왔다 갔다 했죠.
그러다 튤립들이 시끄러운 소음처럼 공기를 가득 채웠어요. 
이제 공기가 그들에 부딪혀 소용돌이쳐요, 강물이
가라앉아 붉게 녹슨 엔진에 부딪혀 소용돌이치듯.
그들이 내 주의를 집중시켜요, 행복했었는데 
얽매이지 않고 놀고 쉴 수 있어서.

벽들도 데워지는 것같아요.
튤립들은 위험한 동물처럼 철창 속에 갇혀 있어야 합니다:
거대한 아프리카 고양이의 입처럼 벌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내 심장을 의식하고 있어요: 그건 나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빨간 꽃들의 사발을 열었다 닫았다 해요.
내가 맛보는 물은 따뜻하고 소금기가 있어요, 바닷물처럼,
그리고 건강처럼 머나먼 나라에서 옵니다. 

 

 




달과 주목나무


이것은 마음의 빛이다. 차갑고 행성처럼 떠도는.
마음의 나무들은 검다. 그 빛은 파랗고 
풀들은 내가 신이라도 되는 듯 내 발 위에 그들의 슬픔을 풀어놓는다.
내 발목을 찔러대고 그들의 굴욕감에 대해 소곤거리며,
연기 같은 증류된 안개가 이곳에 산다
일렬로 늘어선 묘비들로 내 집에서 분리된 채.
다다를 곳이 어디인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달은 문門이 아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얼굴이다. 
꽉 쥔 손가락 마디처럼 희고 지독히도 심란한,
어두운 범죄처럼 제 뒤로 바다를 끌고 다닌다: 달은 조용하다
완전한 절망으로 입을 동그랗게 벌린 채. 나는 여기 살고 있다.
일요일에 두 번. 종들이 울려 하늘을 놀라게 한다 ---
부활을 확언하는 여덟 개의 거대한 혀.
마지막에, 종들은 제 이름들을 뎅그렁뎅그렁 침착하게 울린다. 

주목나무는 위를 찌른다. 고딕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라가면 달과 만난다.
달은 나의 어머니다. 성모 마리아처럼 상냥하진 않다. 
그녀의 파란 망토는 작은 박쥐들과 올빼미들을 풀어놓는다.
나는 다정함을 얼나마 믿고 싶어하는지 --- 
촛불들로 부드러워진 조상彫像의 얼굴,
온화한 시선으로, 특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오래도록 떨어졌자. 구름이 필어나고 있다.
별들의 얼굴 위로 파랗고 신비하게.
교회 안에서, 성자들이 모두 파랗게 되겟지,
차가운 신도석 위를 여린 발로 떠다니며,
신성함으로 뻣뻣해진 그들의 손과 얼굴.
달은 이런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녀는 대머리인 데다 거칠다.
그리고 주목나무가 전하는 말은 암흑이다 - 암흑과 침묵. 

 

 

1956년 테드 휴즈와 실비아 플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