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아이와 산다는 건 불가해한 시한폭탄과 같이 있음을 뜻한다. 마치 인생을 오래 살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듯이. 나는 안다. 나는 기억한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간 다음 벌어졌던 내 마음 속의 갈망을, 그 분노를,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정신적 고통을. 실은 아직도 그런 기분에 젖어들 때가 있지만, 아, 사춘기 아들은 내 앞을 가로 막고 그러지 말라고 조언한다. (젠장!)
결국 삶은 알 수 없고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후예들인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이 우주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증명해 내느라 정작 우리 삶에 대해선 무관심해졌다. 한때 진보적인 좌파 이론가들은 인터넷 세상(사이버스페이스)가 차별이 사라지는 새로운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언비어가 아닌 진실처럼 느껴졌거나 그렇게 만들어야 된다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그것이 유언비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긴 그 땐 모든 인문학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탈정치화'를 외치며 '반이분법주의'를 옹호했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살짝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하던 어떤 이는 자신의 글에 폴 드 만과 데리다,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동일한 선상에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도대체 누가 좌파란 말인가. 애초부터 주의라든가 신념이라든가 하는 당파성이 없는데, 왜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짓는가(아, 이런 식으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글은 진행된다).
간만에 혼자 와인을 마셨다. 미셸 린치(Michel Lynch)다. 코르크마개를 열어두고 다섯 정도 지나서 마시면 정말 좋다. 어제 가장 맛있는 한 잔은 마지막 잔이었다. 너무 천천히 마신 탓인지, 취하지 못하고 심적으로만 취약해졌다. 불안함이 엄습했고 숨겨져 있던 쓸쓸함이 녹아 나를 물들였다. 멜롯과 카베르네 쇼비뇽은 보르도 와인들의 대표적인 조합이다. 적당한 바디의 씀씀함은 나에게 익숙한 프랑스 와인의 세계로 나를 끌어들였다.
다 밀려드는 스트레스 탓이다. 사춘기 아들로 인한 스트레스. 회사 일, 미래에 대한 걱정,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얼룩졌다. 결국 혼술이다. 냉동자숙가리비살로 무침을 했으나, 아, 살짝 냄새가 났다. 결국 살라미를 잘라 안주로 먹으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떠올렸다. 나는 그 사막에 갈 수 있을까? 아니면 죽기 바로 전날 가서 돌아오지 못하면 좋을까. 끝없는 평원이 주는 평온함 뒤의 두려움을 반도의 사람들은 알까. 지평선이 주는 알 수 없는 편안함은 반대로 끝없이 밀려들어드는 병사들의 행진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다. 높은 산이나 계곡을 찾기 위해 며칠을 걸어가도 보이지 않는 대평원. 그렇게 유럽은 몇 번에 걸쳐 초토화되었다.
아, 오랜만에 맛보는 보르도 와인의 거친 질감 밑에 숨겨진 아슬아슬한 감미로움. 예전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좋은 보르도 와인들을 보기 어려웠다. 다른 지역의 와인들이 많이 수입되다 보니, 보르도 와인의 수량 자체가 줄어들었다. 자주 마시고 싶은데. 이 미셸 린치 와인도 찾아보니, 5만원이라고 나온다. 마트에서 2만원 초반대로 구입했는데, 공개된 와인 가격은 믿을 수 없다. 미국 현지에서 20달러에 살 수 있는 와인을 5만원 넘게 주고 마셔야 하는 지경이니, ...
이젠 추억들마저도 기억나지 않을 나이가 되었나, 이름이며 얼굴이며 장소며 음악이며 책 이름이며 시인이나 작가들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면 다시 시작하라고 기억이 리셋되고 있는 것일까. 하긴 다시 시작하기에 적당하지. 또 다른 우주에서. 저 우주에서. 침묵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우주에서. 숨겨진 우주에서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