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11

요즘, 책임에 대하여

젊었을 때는 자유를 이야기했으나, 나이가 들고보니, 자유보다 책임이 더 중요하더라. 그러고 보니 한국 교육은 '책임'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더라. 특히 '책임을 지는 자(리더)'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은 전무했더라(아니면 내가 그렇게 살아온 것인지). 공부를 잘 하는 것보다 책임이 더 중요한데. 책임감이라곤 제로인데, 공부를 잘 했다는 걸로 리더가 되는 모습은 어딘가 이상하다. 요즘 이 나라 모습을 보니, 제대로 된 리더를 찾아보기 힘들구나. 하물며 작은 구멍 가게 사장도 저러지 않는데, 국가/정부의 장(리더)들이 왜 저러는지. 그리고 저런 사람들을 옳구나, 좋구나 하면서 뽑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세상은 좋게 변할 듯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곳인 듯 싶다. 이러다가 브라질처..

구름 위로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보니, 구름이 입체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고대인들의 상상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변하여 이젠 신비로울 지경이다. 그 도저한 신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심스럽게 기도를 하는 것. 내가 이 동네로 왔을 때만 해도 아파트가 이 정도로 많진 않았는데, 이제 아파트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오래된 낮은 아파트와 빌라들이, 그 낮은 건물들 사이로 더 낮았던 양옥 주택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사이 집값도 올라 서울에 사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 된 요즘, 내일을 위해 살지만 내일은 더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문득 내가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 떠올려보니, 참으로 암울해서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

새벽 빗줄기

새벽 빗소리가 열린 창으로 들어와 방 안 가득한 열기를 밀어낸다.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그 기세를 누그러뜨면서 차가운 습기로 채워진다. 이 습기만 견딜 수 있다면, 제법 청량한 잠을 잘 수 있을 게다, 가족들은. 가끔 이 세계가 존재하고 내가 생각할 수 있고 사랑을 느끼거나 행복을 느낄 때, 신비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그건 호르몬의 영향이라고 말할 것이다. 다만 그 호르몬 모두를 지금 알지 못할 뿐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이 신비 앞에서 파스칼은 끝없는 두려움을 느꼈고 20세기 초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우리 존재의 목적이나 이 세상의 기원에 대해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다며 절망했다. 그리고 21세기 초반, 백 년 전 그 절망을 현대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이어받는다. 책을 읽을수록, 내 지..

도망가듯, 연천 호로고루

호로고루(瓠蘆古壘)은 한자 의미 풀이에서도 알 수 있듯 '표주박처럼 생긴 오래된 작은 성'이라는 뜻이다. 지난 토요일, 요즘 일상이 너무 힘들어 바람을 쐴 겸, 언제나 궁금했던 연천 호로고루에 다녀왔다. 그러나 진입로를 찾기 어려웠고 좀 어수선한 분위기랄까. 옆에 임진강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다. 9월달에는 해바라기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없고 10월에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코스모스도 거의 없었다. 기원 후 5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이 남아있지만, 그 외의 것은 흔적만 남았고 이도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다. 일종의 작은 군사 기지 같은 개념으로 강을 끼고 고구려 최남단 경계선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입구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는 것이다.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실..

근황, 그리고 내일

계단을 올라갈 때 오래된 나무 조각들과 내 낡은 근육들의 사소한 움직임으로 얇게 삐걱이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이젠 이런 종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도 없다. 나무 계단은 이제 없다. 만들지도 않는다. 나무 바닥이나 나무 계단을 뛰어가다가 발바닥에 나무 가시가 박히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제는 사라졌다. 한 땐 당연한 일이, 익숙했던 사물이 지금은 낯선 것이 되거나 아련한 것이 된다. 그렇게 나도 요즘, 종종, 가끔 그렇게, 그냥 사라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가장한 어떤 부재.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 스스로에게 공포와 두려움, 끝없는 연민을 느끼곤 한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실제로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이렇게 사는 ..

내 마음은 철거 중

낡은 마음을 부수고 새 마음을 올린다, 올리고 싶다. 늙은 마음을 허물고 젊은 마음으로 교체한다, 하고 싶다.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철거중 #내마음 #재건축 #들어간 #내마음 #내일상 #봄날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님, 2019 4월 8 7:42오후 PDT 내 발걸음은 바람을 달고 앞으로 무한 반복 중. 그러다 보면, 끝에 가 닿겠지. 그 끝의 풍경은 어떨까, 하고 한때 상상했지만, 상상은 현실 앞에 무너지고 사라지고 그저 그 끝도 오늘의 반복이거나 복사이거나 혹은 어제의 모습. Instagram에서 이 게시물 보기 #걷는다 #터널 #끝은어디일까 YongSup Kim(@yongsup)님의 공유 게시물님, 2019 3월 29 4:25오전 PDT 키케로의 말처..

카프카의 드로잉. 그리고

카프카의 드로잉을 한참 찾았다. 뒤늦게 발견한 카프카의 그림. 하지만 제대로 나온 곳은 없었다. 잊고 지내던 이름, 카프카. 마음이 어수선한 봄날, 술 마실 시간도, 체력도, 여유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살짝 절망하고 있다. 한 때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나를 사랑하던 존재들이, 내가 그토록 원하는 어떤 물음표들이 나를 스치듯, 혹은 멀리 비켜 제 갈 길을 가는, 스산한 풍경이 슬라이드처럼 탁, 탁, 지나쳤다, 지나친다, 지나칠 것이다. 내가 보내는 오늘을, 십년 전의 나는 상상하지 못했다. 똑같이 내 십 년 후의 오늘을 지금 나는 상상할 수 있을까. 뜬금없는, 나를 향한 물음표가 뭉게뭉게, 저 뿌연 대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새벽, 여전히 사는 게 힘들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아, 그건 변하지 않았구..

어느 설날의 풍경

겨울비가 내리는 마산 해안도로를 따라 달렸다. 도로 옆 수백억 짜리 골리앗 크레인은 어느 신문기사에서처럼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 텅 빈 자리엔 무엇이 들어올까. 오늘의 아픔은 내일의 따뜻한 평화를 뜻하는 걸까, 아니면 또다른 아픔을 알리는 신호일까.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마음 한 켠의 불편함과 불안함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저 너머 어떤 새로움

아무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공평한 걸까. 내일의, 어떤, 발생하지 않은 일이 현재, 혹은 과거에 미쳤던 영향은 대단하기만 하니, 내일을 아는 이 없다고 해서 세상이 공평한 것은 아니다.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은 인과율(law of causality)을 바탕으로 움직이며, 우리 모두는 인과율적 문명의 노예다. 우리 문명은 인과율 위에 축조되었고 우리 사고도 인과율을 벗어나 한 발짝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모두가 각기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 이 노예 근성은 현 문명에 반하는 모든 혁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떻게 진행될 지 모르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던) 운명에 순응하는 개인이라는 표상이 생기고, 모든 이들 -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나이 든 이나 아..

꿈에 ...

걱정은 태산같고 시간은 쏜살같다. 몇 달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쓸쓸하기만 초겨울, 눈발이 날리는 강변 도로를 택시 안에서 잠시 졸았다. 나는 아주 잠깐, 졸면서 기적과도 같이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다. 며칠 전 가로수를 찍었다. 무심하게 계절을 보내는 은행나무의 노란 빛깔은 어두워지는 하늘과 차가워진 대기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 가로수 밑에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얇은 몸매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처녀가 연신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