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正義의 길

지하련 2009. 7. 18. 16:16

문자 한 통을 보내고 난 뒤, 어지러운 방안을 쳐다보았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어디에서부터 해야할 지 난감하다. 몇 주째 몸상태가 좋지 않아, 집에 들어와선 잠만 잔 탓이다.

오전에 세차게 퍼붓던 비는 잠시 멈추고 바람만 요동치듯 집 안을 휙 스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살아간다는 게 뭘까. 하루종일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주말에도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틈만 나면 책 읽고 글 쓰고 음악은 집중해서 듣고 ... ...
참 재미없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나면,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다는 것에 경악하고 만다. 그 앞에선 보여주어야 할 것만 있는 듯 싶다. 아마 리 호이나키도 보여주기 위해서 산 것은 아닐까.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 10점
리 호이나키 지음, 김종철 옮김/녹색평론사

이 책, 무조건 읽으라고 말하고 싶으나, 그 권유로 인해 이 책을 읽고, 다 읽고 난 뒤의 난처한 기분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다. 

실은 몇 주 전에 다 읽고 간단하게 서평을 올리려고 했으나,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좀 난감한 책이었다. 한 젊은이가 자신이 생각했던 바, 바람직한 삶을 찾아가기 위한 거친 여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거침은 충분히 이론적이며 설득력이 있었으며, 가치 있는 여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말이 앞설 뿐, 실천은 저 멀리 있다. 해석은 번듯하게 하지만, 막상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 앞에선 뒷걸음질 칠 뿐이다. 그것은 젊은 리 호이나키가 마주한 지식인 사회였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정공법으로 대처한다. 그것에 대해 몸을 부딪히며 경험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행동을 담담하게 적는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책에선 읽기 힘든 실천적 교훈이며, 바람직한 세상을 향한 의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창조적인 영감으로 가득찬 이 책에 대해선 종종 이야기할 듯 싶다.

(이 책 안에 리 호이나키가 시골 마을로 가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문득 한국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모두 감명받아 모두 시골로 간다면, 아마, 한국은 온통 작은 도시들로 이루어진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작은 땅에 인구가 많다.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지휘자 이스트반 케르테즈는 교통사고로 사십대 중반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브람스에 대한 탁월한 해석자로 알려져 있으며 유럽의 여러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이스트반 케르테즈를 내가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1960년대 중반 런던필과 함께 녹음한 모차르트의 '레퀴엠' 때문이다. 힘 있고 집중도가 높으며 선명한 연주와 합창으로 유명한 이 연주는 칼 뵘의 느리고 흐느적거리는 듯한 음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칼 뵘의 레퀴엠이 최고라는 평판을 나로선 도통 이해하기 어렵지만. 차라리 아르농쿠르나 필립 헤레베레가 훨씬 낫다.)

이 음반은 부드럽고 감미롭다. 오늘 같은 날씨엔 딱 어울리진 않지만.

그런데 답 문자가 오질 않는다. 이럴 때 제법 난처해지는데 말이다. 저녁에 비가 적게 오길. 이제 아트페어 준비 회의에 가야 한다. 휴~. 8월이 지나면 좀 나아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