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문학의 웃음과 미하일 바흐친

지하련 2010. 11. 2. 21:59



 

1999년 말, 작가 귄터 그라스는 뤼베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를 맞이했다. 이들은 사회 및 지식인 사회의 현실을 함께 진단하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대담은 이내 활기를 띠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재미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대 자체가 정말 재미없잖아요. 도대체 웃을거리가 없는 거죠.”(부르디외)
“저도 우리가 재미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문학적 수단이 유발하는 끔찍한 웃음은 우리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저항이기도 합니다.”(그라스)
- 피에르 랭베르, ‘예수도 웃었을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한국어판)




르몽드 디플로마크 9월호를 읽으면서 웃고 말았다. 재미없는 시대의 지식인들은 참 재미없다는 부르디외의 저 말, 그리고 문학이 선사하는 끔찍한 웃음이 가지는 사회적 저항을 이야기하는 귄터 그라스.

그러고 보니,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웃었던 것이 언제인가 생각해보았다. 건강한 웃음이 가지는 위력을 잘 알고 있지만, 그 웃음을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웃음,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금은 전하지 않는, 희극에 대한 ‘시학’을 끄집어냈던 것은 중세가 웃음으로 무너지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억압받는 이들에게 저항의 수간을 제공하기 위해 웃음이 갖춰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우선 민중적 기반을 확보해야 하고 웃음이 터지면서 하나의 총체적 세계관을 배출해야 하며 끝으로 사회질서와 전복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 피에르 랭베르, ‘예수도 웃었을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한국어판)



긍정을 위한, 미래를 향한 웃음이 사라지는 시대에 귄터 그라스의 말처럼 끔찍한 웃음이라도 남아 사회적 저항을 이어나가야할 텐데, 실은 그런 끔찍한 웃음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같다. 그런데 아마 끔찍한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을 만든다면, 아마 포스트모던적 무관심 속에서 사라지고 말겠지.

피에르 랭베르는 미하일 바흐친을 이야기하면서 중세 말기의 민중적 웃음을 환기시킨다. 한 때 한국에서도 미하일 바흐친이 유행처럼 지나갔는데(요즘의 지젝이나 들뢰즈처럼), 지금 이 때 미하일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민중적 웃음이 필요하는 시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