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어느 일요일의 음악

지하련 2012. 12. 9. 23:16

아무 것도 쓸 것이 없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적어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 나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걱정, 앙심, 초조, 강박관념이 나를 긁고 할퀴고, 되풀이해서 덮치도록 내맡겨져 있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도 안 되고, 일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의 일부가 내 마음 속에 부글거리고 일어난다. 서섹스 전체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 1921년 8월 18일 목요일,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자신의 일기가 출판되어 나올 거라 생각했을까. 주말 내내 마음은 무겁고 슬프기만 했다. 이런 내색을 비치는 건 가족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라 여기는 탓에, 숨기느라 다소 힘들었고 도리어 짜증만 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몇 장의 시디를 꺼내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책 읽기는 몇 달 사이 너무 형편없어져 버려, 활자에 시선은 두었나 집중이 되지 않았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여서 펜을 잡기가 무섭게 놓쳤다. 어느 방향으로 살펴보나, 지금의 나는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연말을 보내고 있었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인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덮자, 12월 어느 일요일 밤 어둠이 방안으로 밀려 들어온다. 위안은 역시 글이 아니라, 술과 음악 뿐이다. 







 

첼리비다케가 지휘한 베를린 필의 '차이코프스키의 5번 교향곡'을 들었다. 1948년 연주다. 모노이지만, 최고의 연주들 중의 하나다. 




라수스의 음악을 듣고 있다. 16세기의 미사곡은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