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요즘 정치에 대한 인용

지하련 2013. 12. 6. 14:46



회사도 어수선하고 내 일상도 어수선하다. 예전같으면, 독서나 음악 듣기 - 아니면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 로 마음을 추스렸을 텐데, 요즘은 그것마저도 어렵다. 이 나라 마저도 어수선하니, '어수선'은 2010년대 전반기의 테마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처한 현실이 1900년대 대한제국이 패망하기 직전의 상황과 거의 동형 구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내외적 상황과 지금의 내외적 상황이 100여 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에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거죠."  (관련 기사)


아마 후대의 역사가들은 190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정치적 혼란기'로 정의내릴 것이다. 그런데 실은 우리는 해답을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나 그것을 해야 할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 해답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러니 나라가 이 모양이겠지. 


그리고 이 일은 이 작은 반도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지나간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진다. 


오늘 아침 다산연구소 칼럼 레터는 참 읽을만 했다.

(예전에는 꼬박꼬박 다산연구소 칼럼을 읽었는지, 읽지 못한 지 꽤 되는 듯하여 마음이 아팠다.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건지, 정성을 다해 바쁘게 살면서도 늘 힘든 건지.)



 


[이야기] 오랑캐를 따르는 자



강명관 교수 (부산대) 




담헌의 중국인 친구


  1766년 담헌 홍대용은 북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세 사람의 중국 지식인과 사귄다. 2월 한 달 동안 6차례의 만남을 통해 네 사람은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쌓았다. 서로 형과 동생이 되기로 결정했으니 한 때의 객기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도 적지 않았다. 담헌이 연 길을 따라 이후 유금, 박제가, 이덕무, 박지원 등 이른바 연암그룹이 이내 북경 땅을 밟았다. 그중 박제가는 4회에 걸쳐 중국 땅을 밟은 최고의 중국통이 되었다. 박제가가 구축한 인맥 위에서 추사 김정희가 청의 석학 완원?옹방강을 만났으니, 1766년 담헌과 엄성 등의 우정은 조선 후기 문화사에서 그 의미가 실로 크다 하겠다. 하지만 파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담헌은 중국인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너무나 기뻤고, 귀국 후 그들과 나눈 필담이며 편지를 정리해 주변의 친지들에게 보여주었다. 대부분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담헌의 우정을 고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외국인끼리 우정을 나눈 것은 고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면서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런저런 부러움과 비난이 퍼져 나가다가 마침내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담헌이 북경으로 떠날 때 잘 다녀오라고 글까지 지어주었던 김종후가 작심하고 담헌을 비난했던 것이다.


비난을 받다


  담헌에게 그 말을 전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담헌과 김종후 사이에 편지가 오갔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김종후는 엄성 등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비난했다. 한인(漢人)으로서 명(明)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더러운 오랑캐 청의 조정에 벼슬을 하려고 하는 인물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들은 오랑캐와 진배없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과 사귄 담헌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니다. 김종후의 말을 압축하면 담헌 역시 ‘오랑캐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담헌은 명이 망한 지 벌써 오래이므로 모든 한인에게 벼슬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또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결과 그들 역시 명을 깊이 생각하고 있으며, 청의 지배를 무조건 긍정하고 있지는 않았다고 되받았다. 논쟁은 승자 없이 대충 마무리되었다.


  김종후는 왜 담헌을 비난했을까? 그는 논쟁의 말미에서 담헌이 강희제의 정치를 높이 평가한 것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김종후의 속내였다. 강희·옹정·건륭에 이르는 1세기 반 동안 청 제국, 곧 중국은 절정기를 누리고 있었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은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춘추대의(春秋大義)와 대명의리(對明義理)를 굳게 믿는 조선의 양반 나으리들은 그것을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담헌은 그 금기를 범했던 것이다. 웃기는 것은, 춘추대의, 대명의리를 주장한 사람들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좋은 벼슬은 다했고, 북경 구경도 도맡아 했으며, 북경에서 수입되는 사치품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이다. 김종후만 해도 자기 동생 김종수가 우의정을 지낸 청풍 김씨 벌족(閥族)이 아니던가.


오랑캐를 따르는 자


  말이 났으니 말이지 춘추대의니, 대명의리니 하는 거창한 명분이 현실에서 구체화된 적이 없었다. 청에 대들거나 병력을 기르고 무기를 만들고 군량을 비축하는 일은 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청을 오랑캐니 뭐니 하면서 업신여기고 증오했지만, 명을 위해 복수는 꿈도 꾸지 않았던 것이다. 춘추대의, 대명의리는 마음에 안 드는 반대파를 때려잡는 구실일 뿐이었다. 특히 세상이 불평등하고 모순이 많다면서 바꾸자고 하는 사람을 위협하거나 제거하는 데는 그저 그만이었다. 선진화된 중국을 배워 상공업을 발달시키자고 제안했던 박제가를 당벽(唐癖), 곧 ‘중국에 미친 인간’이라고 비난하고, 청의 연호를 썼다 하여 연암의 『열하일기』를 ‘호로지고(胡虜之藁)’ 곧 오랑캐의 글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다 거기서 나온 작태였던 것이다. 다산을 귀양 보낸 것도 이들이었다.


  요즘도 그렇다. 정부에서 하는 일, 여당에서 하는 일을 비판하면, 무조건 이상한 어휘를 갖다 붙인다. 번역하자면, ‘오랑캐를 따르는 자’란 비난이다. 우습다. 18세기의 일을 21세기에 다시 보다니!



다산연구소 칼럼 레터는 제법 좋다. 받아 읽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