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하련 2013. 12. 29. 23:48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 논문들과 연설 하나 Wirklichkeiten in denen wir leben 

한스 블루멘베르크Hans Blumenberg(지음), 양태종(옮김), 고려대학교 출판부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세계의 독서가능성>>(Die Lesbarkeit der Welt, Suhrkamp, 1981)은 문학동네 모더니티총서로 번역, 출간될 예정이었으나 어떤 연유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출간되지 못했다. 나는 이 총서의 목록을 통해 흥미로운 제목인 <<세계의 독서가능성>>으로 그에 대해 흥미를 느꼈고 그의 책이 번역되길 기대했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짧은 책 한 권이 번역되었을 뿐이고, 오늘 내가 리뷰하고자 하는 이 책이다. 그러나 내 리뷰는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이 블로그에 자주 오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 나는 직장인이고 전문 학자이거나 학생이 아니기에). 역자인 양태종 교수(동아대 독문학과)는 스스로 ‘비판을 감내해야 할 번역본’이라고 적었으나, 이는 독자인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꼼꼼히 읽고 정리한다면, 1) 철학에서의 ‘기술’, 2) 모방과 예술, 그리고 근대 예술의 자율성, 3)철학과는 다른 수사학의 위치, 4)시적 언어와 진리 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할 독자가 몇 명쯤 될까.


인문학이 유행이라고 하지만, 인문학이 유행이 아니라 유행뿐인 어떤 것들 - 차마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조차 어려운 - 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유행을 쫓는 이들에게 이 책은 너무 어렵거니와 현실과는 참 멀리 떨어져 보일 것이다. 하긴 너무 전문적인 철학책이기도 하지만.  


네 개의 논문, <현상학의 양상들에서 본 생활세계와 기술화>,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 <언어상황과 내재시학>은 다소 어려웠으나, 나에게 매우 유용한 글들이었다. 특히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은  예술의 자율성과 근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었으며, 특히 자연의 모방이라는 관점을 벗어나 어떻게 예술 작품이 존재의 세계로 나아가는가에 대한 흥미로움을 안겨주었고, <수사학의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은 철학과는 다른 입장에서 출발한 수사학이 어떻게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이것이 ‘철학적 인간학’과 연결되는가를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고대와 근대를 오가며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었다. 


짧으나, 폭넓은 인용과 뚜렷한 주제의식이 담긴 논문들로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기술(테크네), 수사학, 예술과 언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그는 근대적 입장 - 기술, 예술, 수사학, 시학 등이 자연의 모방이거나 본래 잠재해 있던 어떤 형상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것인가를 정초해 나가게 되었는가에 대해 분명한 해석을 이 짧은 책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철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을 때, 보다 제대로 읽을 수 있고,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

한스 블루멘베르크저 | 양태종역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1.09.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 


이 책은 고려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수사학 총서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는 한스 블루멘베르크가 현대 수사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수사학과 현재적 현실에 대한 인간학적 접근>을 읽어본다면 알 수 있다. 그는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의 수사학과 싸우면서 추정한 것은 이들의 수사학이 진리[에]의 [도달] 불가능성 테제에 근거를 두고서, 이로부터 참인 것 대신에 관철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는 권리를 끌어낸다는 것이다’(126쪽)라고 말한다. 이렇게 수사학은 철학과는 적대적인 위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전통에서는 ‘신의 진리가 수사학적 방식의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장식 없이 그 자체로 제공되어 한다는 것’, 그래서 신의 진리를 이야기한 성인들의 말들은 ‘수사규칙을 보호하기 위한 꺼풀 안에서 더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다'. 중세 후기로 갈수록 수사학은 자신만의 영역을 차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신의 세계와 차츰 그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인간적 세계에 대한 긍정, 또는 인정이 시작되는 때와 일치한다. 그리고 '근대 미학에서는 수사학의 함축이, 수사학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리와 관련이 있다는 함축이, 수사학의 최종 승리를 찬미한다.’(126쪽) ‘심지어 예술과 진리가 동일시된다. 플라톤이 정립한 철학과 수사학 사이의 적대감은 철학 자체에서, 최소한 철학의 언어에서, 철학에 대항하는 미학으로 명백히 나타난다’(127쪽)고 말한다. 


이 논문 속에서 블루멘베르크는 수사학의 철학적 근거가 어덯게 마련되고 있는가를 서술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기술 - 자연의 모방이거나 이미 자연, 혹은 재료에 내재된 어떤 형상(잠재태)의 의지로 구현되는 현실태가 아니라 근대적 의미의 창조/발명으로서의 기술에 대한 설명, 그리고 예술의 창조성, 자율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예술은 그 자체가 곧 인간의 가능성들에게 모범적인 존재이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의미하려고만 하지 않고, 무언인가로 존재하려 한다’(123쪽)고 말한다. 그는 고대/중세적 세계를 벗어나 근/현대 예술의 입장, 즉 존재로서의 예술을 분명히 드러낸다. 파울 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 ‘최종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연한 것을 본질로 만드는 일”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수사학 총서의 한 권으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실은 철학 전문 서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