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지도 십수년이 넘었다. 한창 싸이월드 모임에서 활동하며, 일요일 오후 상수역 인근에서 와인카페를 하던 후배가 있어, 가끔 번개할 때가 좋았다. 와인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향기로, 아름다운 사람들과 근사한 음악과 우아한 공간 속에서 더 빛난다. 소주는 아무렇게나 마셔도 소주만의 강렬함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지만, 와인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하기만 하다. 그래서 배경을 신경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때론 약점이기도 하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강렬함과 깊은 향을 가지고 있으나, 그, 또는 그녀가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정하는 술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짝 어둡고 무거운 공간, 두 명이나 세 명이서 격렬한 감정의 모험 속에서 제대된 멋을 부릴 줄 안다. 종종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는 해변가에서 조금 덥구나 하는 생각이 스칠 때 볼 위로 내려앉는 바람들이 있을 때, 종종 위스키는 제대로 향을 풍길 때도 있지만, 그건 아주 드문 일에 속한다.
자주 술은 우리를 지배하며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도 하는데, 고대부터 이는 디오니소스, 또는 박커스의 행위라고 보았다. 와인은 상당히 까다로워서 이런 저런 준비를 하며 준비물도 살짝 많다. 실은 아무렇게 마시자는 주의이지만, 마실 때마다 아쉽기는 매 한가지다. 조금만 차갑게 할 걸 그랬나, 조금 디켄팅을 할 걸 그랬나, 이 잔 말고 다른 잔으로 마실 걸 그랬나, 안주를 준비할 걸 그랬나, 그리고 당신이 왜 내 앞에 앉아 있지 할 걸 그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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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eau Meyney Prieur de Meyney 1999
Saint-Estephe, France
저 사진 속의 1999년산 생 에스테프 와인은 Chateau Meyney의 세컨 와인이다. 지금 마실 수 있는 빈티지는 2000년 대 중후반부터다. 나를 와인의 세계로 초대한 와인이기도 한데, 살짝 부드럽게 내려앉다가 풍부한 과일향으로 입 안을 채우더니, 마치 우유와 같이 미끄러지듯 빨려 내려가는 피니시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세계였다. 십수년 전 그렇게 와인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런저런 메모를 정리하다 저 사진이 나와 이렇게 올려본다.
그러고 보니, 기분 좋게 와인 마신 것도 참 오래된 것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