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하련 2019. 4. 29. 18:25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지음), 이윤기(옮김), 열린책들 





하나, 둘, 셋, 넷, ... ... 계단을 올라가듯 만남도, 사랑도, 인생도 그렇게 올라갔으면. 하지만 쉽게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요즘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터, 꿈은 부질없고 희망은 덧없고 현대의 사랑은 하면 할수록 쓸쓸해지기만 한다. 이 소설 속 '나'도 그렇게 여겼던 건 아닐까.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한기가 느껴져 두 번째로 샐비어 술을 시켰다. 나는 자고 싶은 욕망과 이른 새벽의 피로, 그리고 적막과 싸웠다. 나는 희뿌연 창문 저쪽의, 뱃고동과 짐수레꾼, 뱃사람들의 고함 소리로 깨어나는 항구를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동안 바다, 대기, 그리고 내 여행 계획으로 짜인,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내 가슴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p.9) 



하지만 압박은 조르바에 의해 금세 해체된다. 이 책의 주인공은 ('나'가 아니라) 단연코 '조르바'다. '조르바'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이 소설은 생명력을 얻고 곧장 앞을 향해 달려 나간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식인 '나' 옆으로 일자무식의 '조르바'는 쉬지 않고 움직이며 실천한다. '나'가 읽는 책에는 그가 원하고 '조르바'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한 해답은 없고, 그로 인해 회한에 잠길 무렵 고개를 돌리면 춤을 추고 산투르를 연주하는 '조르바'가 있고, 그의 옆으로 지중해 바다가 펼쳐진다. 탄광 사업은 진척이 없고 소설 대부분은 까닭 모를 '나'의 고뇌들이 이어지고 그것을 딱하게 여기는 '조르바'의 잡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나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처럼 심오하지 않다. 어렵지 않다. 빙빙 돌리지도 않는다. '조르바'는 그런 지식인들의 그런 태도와 말투를 무시하며, 심지어 조롱하는 듯 하지만, 언제나 '나'를 배려하며 지지한다. 그러다가 결국(혹은 우연히) 마담 오르탕스가 죽고 '나'와 정을 나눈 과부가 살해당한다. 



우리는 과부이야기도 마담 오르탕스 이야기도 하느님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바다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p.389) 



소설 속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등장하고 죽는다. 자살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세월이 흘러 편지로 죽음을 알려오기도 한다. 어떤 죽음은 너무 부조리하여 절망적이기까지 하지만, 소설 속 분위기는 조용하고 담담하기만 하다. 어쩌면 그렇게 흘러가는 것으로 예정되었음을 '나'도, '조르바'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한다. 실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처럼. 그저 한 순간 한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나'와 '조르바'의 대비로 인해 이 소설의 이야기는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은 그 대비가 이루어내는 이야기 밑에 깔려 있는 '자유', 즉 매순간 순간을 눈 앞을 가로막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것을 향한 모험으로 이해하는 어떤 정신(태도)로 인해 이 소설은 추동력을 얻으며, 끊임없는 감동으로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있다.  







이십 대에 이 책을 한 번 읽으려 한 적이 있었으나, 읽지 못한 채 십수년이 지난 지금에서 다 읽었다. 새삼스럽게 이 소설을 읽으며 그리스와 터키, 터키와 크레타에 대해 알았으며, 그리스의 근대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카잔차키스의 다른 책들도 몇 권 챙겨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 <그리스인 조르바>는 너무 유명한 탓에, 번역서들이 난무한다. 대부분 중역본인데(이 번역서도 포함해서), 최근 번역된 것에는 그리스어에서 바로 옮긴 것도 있으니, 이윤기 선생의 번역과 비교해보며 읽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다. 




내 머리 위로 별이 움직였다. 내 머리통도 천문대 돔처럼 별자리에 따라 움직였다. '그대로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라, 함께 따라도는 것처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 한 마디가 내 가슴 속에서 조화로운 울림을 지어내었다. (p.333) 




살짝 더워지기 시작하는 올해 봄, 강력하게 추천한다. 굳이 내 추천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추천하는 20세기 최고의 소설들 중 한 권이니.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10점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