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

지하련 2020. 3. 11. 18:54






독서에 관하여 

마르셀 프루스트(지음), 유예진(옮김), 은행나무 




<독서에 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지만, '독서'에 대한 수필집은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의 책들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쓴 에세이들(역자 서문이나 해설)로 짧게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뿐, 나머지는 모두 화가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글들로 인해 이 책을 구입했다. 때때로 우리는 미술평론가나 철학자(미학자)가 쓴 예술론에 실망하고 그 대신 소설가나 시인이 쓴 어떤 글들로 놀라고 감동받는다. 이 책도 그렇다. 그렇지 않더라도 프루스트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은 없을 테니.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설가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존 러스킨에 심취해 있었다. 오랜 기간 그의 책들을 영어에서 불어로 번역했다. 



초기에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글에 심취하여 열성적으로 그를 탐독하고 연구하지만, 러스킨을 번역하는 데 7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점차 자신만의 예술론을 구축하며, 그런 과정에서 점점 러스킨의 미학에 회의를 느끼고 거리를 두게 된다. (207쪽, 역자해설 중에서) 



존 러스킨은 19세기 영국 최고의 예술 비평가이면서 사회사상가였으며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영국, 또는 유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점에서 전형적인 19세기적 인물이었다. 인상주의 이후의 모더니즘 예술이나 오스카 와일드식의 유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지금의 시선으로 보기에 다소 과도할 정도로 도덕적이며 실천적인 예술론을 주장하였다. 이런 탓에 현대 예술론에서 존 러스킨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글들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치밀하며 통찰력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직접 읽는다면 아마 다른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정도로 뛰어난 글들을 남긴 작가였으며 그 당시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젊은 마르셀 프루스트도 마찬가지였으니, 존 러스킨에 대한 감동으로 직접 그의 저술들을 불어로 번역하고자 매달렸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세계는 러스킨의 세계와는 다르다. 프루스트는 20세기를 열어놓은 소설가이지만, 존 러스킨은 19세기 예술론의 정점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 책에서 프루스트는 맹목적인 추종이나 숭배가 아니라 러스킨의 견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며 자신만의 주장을 이야기한다. (프루스트만의 예술에 대한 이러한 해석과 태도는 고스란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이어져 빛을 발하게 된다. 이는 유예진의 역자 해설에서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그 이유는 프루스트가 러스킨의 미학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두 요소, 즉 도덕에 입각한 미의 기준과 현실과 예술을 혼동하는 러스킨식 우상숭배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236쪽, 역자해설 중에서)




존 러스킨 




하지만 독자들은 이런 예술론을 알아차리기 전에 프루스트에게 먼저 매혹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관찰력, 묘사,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은 우리가 익히 알고 경험했지만, 명확한 문장을 접할 수 없었던 어떤 글로 우리를 초대한다. 



나는 시골의 호텔들에 들어설 때면 기쁨을 느낀다. 그런 호텔에는 춥고 긴 복도를 따라 바깥바람이 들어와 난방장치가 애쓰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고, 벽에 걸려 있는 유일한 장식이라고는 마을 지리가 자세하게 표시된 지도뿐이며, 작은 소음은 고요함을 이동시켜 그것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면서, 시원한 바깥 공기가 호텔 방에 갇혀 있던 공기 냄새를 씻어버리려 하지만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고, 후각은 그 내음을 상상하기 위해서 다시 맡아보려 백 번도 더 애쓰며 이를 모델 삼아 그 공기가 간직하고 있는 생각들과 추억들을 방 안에 재생시키려 하는 것이다. 저녁에 문을 열고 호텔 방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곳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삶을 방해하는 것만 같고,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식탁이나 창문이 있는 곳까지 가면 마치 무례하게 여인의 손을 잡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19쪽) 



이렇듯 사소한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면서 묘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해석하는 프루스트 앞에서, 존 러스킨 뿐만 아니라 이 책에 언급된 많은 화가들은 감사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프루스트가 자신에 대하여,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책의 후반부는 화가론으로 이어진다. 특히 샤르댕에 대한 글을 놀랍기만 하다. 샤르댕의 작품을 보면서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는 이는 아마 마르셀 프루스트 밖엔 없을 것이다. 




뜨개질하는 방이나 거실, 부엌, 찬장이 그려진 그림이 당신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샤르댕이 이러한 것들을 대면했을 때 순간을 포착해서, 일시성을 제거하여 그것들에 깊이와 영원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109쪽) 



샤르댕이 당신에게 자신만이 느끼는 비밀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정물들은 이번에는 당신에게 더 이상 그들의 아름다움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정물은 이제 살아서 생명을 띠게 된다. 정물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당신에게 전할 이야기들, 빛을 발하게 될 영광, 베일이 벗겨질 비밀로 가득하다. 만약 며칠 동안 샤르댕의 그림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면 당신은 일상에 매료될 것이며, 회화의 삶을 이해하고, 더불어 삶의 아름다움을 쟁취하게 될 것이다. (110쪽) 



긴 잠에서 깨어난 공주처럼 각각의 물체는 새롭게 부여된 생명에 의해 색조를 띠고, 당신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며, 숨을 쉬고 삶을 이어간다. (111쪽) 



Still-Life with Pipe an Jug

c. 1737

Oil on canvas, 32,5 x 40 cm

Musee du Louvre, Paris




그리고 앙트완 와토에 대한 글도! (앙트완 와토는 언제나 나를 매혹시킨다.)



나는 연민이 섞인 호감을 가지고 종종 화가 와토의 삶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은 회화이자 알레고리, 사랑과 즐거움의 예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전기작가들은 한결같이 그가 너무나 허약해서 사랑의 즐거움을 한 번도, 거의 한 번도 경험할 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작품 속 사랑은 구슬퍼 보이고 왠지 즐거움조차도 그런 것 같다. 우리는 그가 처음으로 근대적인 사랑을 그렸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즉 대화, 식탐, 산책, 슬픈 분장, 흐르는 물과 시간 등이 그림 속에서 즐거움 그 자체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그러한 것들을 일종의 무기력한 화려함으로 보여주었음을 의미한다. (149쪽) 



Pleasures of Love

between circa 1718 and circa 1719

oil on canvas

Height: 600 mm (23.62″); Width: 750 mm (29.52″)

Gemaldegalerie Alte Meister



초반엔 읽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의 리듬이 다소 어색할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금세 적응할 것이고 프루스트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의 소설보다는 확실히 짧은 책이니, 부담이 덜 할테니.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빨리 다 읽어야 하는데... 


그리고 역자 유예진에게도 감사를! 자세한 역자해설은 이 작품을, 그리고 마르셀 프루스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마르셀 프루스트 : 독서에 관하여 - 10점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