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예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하련 2020. 6. 14. 13:48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Kulture der Renaissance in Italien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안인희(옮김), 푸른숲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러나 쉽게 날아가버리네!

즐거운 사람이여, 즐거워하라 

내일은 아무 것도 확실치 않으니 

Quanto e' belle giounezza

Che si fugge tuttavia!

Chi vuol esser lieto, sia:

Di doman non c'e' certezza 

- 로렌쪼 일 마니피코(Lorenzo die' Medici) 



굳이 내가 이야기하기 않아도 이 책은 너무 유명하다. 문화사나 예술사가 학문의 주류로 등장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책이며, 역사 서술에 대해 있어 새로운 방식을 선 보였으며, 이탈리아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던 '근대적 개인(자아)'을 다양한 역사, 문화적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최초의 책이었다. 하지만 선뜻 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에 책 분량이 만만치 않아, 나 또한 필요한 부분만 읽어오다가 이제서야 정독을 했다. 본문만 600 페이지가 넘고 주석까지 합치면 700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나 한 번 들고 읽기 시작하면 금세 책 속으로 빨려들어갈 만큼 서술은 유려하고 흡입력이 있으며, 재미있고 흥미로운 역사적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 ~ 1897)은 르네상스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특히 역사 서술에 대해서, 그리고 근대적 개인에 대해 깊이 있는 글과 통찰을 보여주었다. 젊은 니체가 그의 강의를 들었다는 에피소드로도 유명하지만, 그가 강의했던 바젤대학교(스승인 랑케 교수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의 예술사 강의는 한 번도 50명을 넘긴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에서 보여주듯 하나의 주제(소재)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분야를 뛰어넘어 제시되는 다양한 사료와 인용, 인물들, 그리고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을 학생들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나 또한 서양 예술사 공부를 할 때, 그런 경험을 하였으니). 그는 역사연구의 임무란 '발전'이 아니라 '뒤풀이되는 것, 반복되는 것, 유형적인 것'의 세 가지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함으로써 우리 현대 문화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결정적인 작용을 남겼다. 이 점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책의 말미에 실린 <랑케와 부르크하르트>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안인회는 역자 서문에서 부르크하르트의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소개한다. 


즉 현대인의 기원과, '개인'이라는 의식의 생성 과정에 대한 질문이다. 현대인, 적어도 서양의 현대인은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개인주의라는 것이 그 발생 단계에서 다각도로 탐색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서양의 의식의 근원적인 국면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것은 유럽인의 자기 탐색이라는 측면을 지니는 책이다. 


재미있는 것은 개별적인 인식들이 먼저 인문주의(글)로 나타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 미술이 그 뒤를 따랐다는 사실이다. 먼저 인식이 생겨나고 이어서 표현이 뒤따른 것이다. 이것은 이 책의 주요 명제의 하나이다. 


부르크하르는 이 책에서 르네상스 사회와 문화를 기술하면서 사건의 역사를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관찰하지 않았다. 르네상스를 특징짓는 요소들, 이 기간에 되출이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독자의 눈 앞에 파노라마처럼 전개해 보인다. 시간의 순서에 따른 발전의 양상이 아니라 시대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보이는 것이다. 이른바 횡단면(橫斷面) 서술이다. 역사를 발전 과정으로 보는 헤겔적인 역사관과 대비되는 방식으로 문화사가들은 그의 이런 문화사 쓰기 방법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1. 예술품으로서의 국가

2. 개인의 발견

3. 고대(古代)의 부활

4. 세계와 인간의 발견

5. 사교와 축제

6. 풍속과 종교 


위 목차대로 책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주로 14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의 이탈리아 두 도시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독립을 지킨 도시들 가운데는 인류 역사 전체에세 가장 중요한 두 도시가 있다. 끊임없는 격동의 도시 피렌쩨. 우리에게 개인과 전체의 온갖 생각과 의도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주었고, 3백년 동안이나 이 운동에 동참하였던 도시 피렌쩨가 그 한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정체(停滯)되어 있고, 정치적으로 침묵을 지키는 도시 베네찌아였다. 이들은 생각해 낼 수 있는 한 가장 극단적인 반대현상이었고, 이들 두 도시는 세상과 그 무엇과도 견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96쪽)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당히 복잡한 활동이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몇 명의 천재들만 기억해도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가령 단테, 페트라르카, 피코 델라 미란돌라, 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혹은 마키아벨리나 로렌쪼 디 메디치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안내서이지, 각 인물(천재)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진 않는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모습을 한 눈에 보게 하지만, 전 유럽적 상황에서 르네상스나 중세에서 르네상스, 혹은 근대로의 이행 과정이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빛나게 했던 천재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독서가 필요하다. 


아래는 책의 일부를 옮긴 것이다. 필요한 경우 내 의견을 덧붙였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이다. 자구(字句)에 얽매이는 학파 속이 아니라 현자들의 모임 안에서, 안드로마케의 어머니나 니오베의 아들들에 대해서 토론하는 곳에서, 그 곳으로 가까이 오는 사람은 야만인들도 혀가 아닌 가슴 속에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 그는 고전적인 고대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에 분명하게 반대하고 모든 시대의 학문과 진실을 옹호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251쪽) 


 


그러나 위대한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감정에 불러일으키는 더욱 깊은 작용에 대한 확고한 증거는 단테에게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몇 줄의 시 안에, 부드럽게 찰랑이는 바다의 떨리는 빛을 머금은 아침 공기, 숲의 폭풍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할 뿐만 아니라 단지 먼 곳의 경치를 즐길 생각으로 높은 산에 오르기도 했다. (360쪽) 


단테 이전, 풍경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나 표현이 거의 없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특히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연풍경이 드러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였다. 이 시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연풍경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중세의 유비론(Doctrine of Analogy)에서 자연은 하등한 것이었다. 중세 유비론의 시각에서는 신 > 인간 > 자연으로 이어진다. 더구나 자연은 이교도적이거나 비밀스러운 존재였다. 차라리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아래 작품은 조르조네(Giorgione)의 <<폭풍>>이라는 작품이다. 군인과 집시여인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등장하고 마치 폭풍이 올 것같은 배경은 상당히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양 풍경화의 초기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풍경화로 분류되지 않는다. 다만 풍경이 작품 전면에 등장한 최초의 작품들 중 하나다. 그만큼 희귀했다고 할까.


Giorgione, The Tempest 

1508년, oil on canvas, 83 cm × 73 cm

Gallerie dell'Accademia, Venice



이것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우선 적어도 12세기 이후로 도시에서 귀족과 시민이 공동으로 거주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으로써 공동의 운명과 오락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시민과 격리되어 성에서 바라보는 세계관은 아예 형성단계에서 방해를 받았다. (434쪽) 


도시화는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들 중 하나이다. 도시의 시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전, 12세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만 도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수준으로 격렬한 변화가 일어나진 않았다. 가령 파리는 12세기 르네상스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도시이지만, 그 이후의 변화는 더디기만 했다. 이러한 도시화가 역사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세속화를 가속화시켰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 형태가 싹 트기 시작했고 빈번해지는 교류와 교역, 이방인의 방문으로 일상은 보다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아주 느린 속도이긴 했으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귀족(고귀함)이란 탁월함과 물려받은 부에 근거한 것"이라는 정의에서, 귀족이란 자기 자신의 탁월함이나 혹은 조상의 탁월함에 근거한다는 자신의 정의를 이끌어냈다. (...) 혈통이란 당사자가 매일 새로운 가치를 거기 덧붙이지 않는다면, 시대가 언제라도 벗어버리는 외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435쪽) 


출생의 차이가 특별한 이익을 주는 일이 줄어들수록 개인은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킬 필요가 더욱 커졌다. (444쪽) 


당시 위대한 이탈리아 여성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그녀가 남성의 정신, 남성의 마음을 지녔다는 말이었다. (...) '여장부(virago)'라는 호칭은 오늘날에는 대단히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칭찬이지만 당시에는 순수한 칭찬이었다. (475쪽) 


"그렇다. 우리 이탈리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비종교적이고 악하다."

"우리는 특별히 개인주의적이다. 우리는 종족의 도덕성과 종교의 한계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외적인 법칙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았고, 그들의 관리와 판관들은 못돼먹은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 대표자들을 통해서 가장 나쁜 예를 보여주기 때문"

- 마키아벨리 (515쪽에서 재인용) 


"명예를 높이 여기는 사람은 모든 일에 성공한다. 그는 노력도, 위험도, 비용도 꺼리지 않고 바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시험해 보았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이 강력한 충동에서 나오지 않은 인간의 행동은 공허하고 죽은 것이라고." 

- 귀치아르디니Guicciardini(517쪽에서 재인용)


모든 정열은 결혼한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525쪽) 


의외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언급이 많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책에서 거기까지 소화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르크하르트는 이 책에 필적할 만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책은 쓰지 않았다. 말년에 <<루벤스의 회상>>이나 초기 저서인 <<The cicerone; an art guide to painting in Italy: for the use of travellers and students>>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인회의 이 역서는 현재 구할 수 없으므로, 한길 그레이트북스로 나온 걸 사서 읽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중세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까지 한 번에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중세 전반에 대해서는 자크 르 고프의 <<서양중세문명>>, 후기 중세(혹은 고딕)에 대해서는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 그 다음 이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을 읽으면 어떨까 하는. 


들고 다니기 상당히 부담스럽긴 하나, 그래도 들고 다니게 될 만큼 재미있는 독서를 선사할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 10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지음, 안인희 옮김/푸른숲



* 로렌쪼 일 마니피코(Lorenzo de' Medici, 별명 '위대한 사람' 로렌쪼 Lorenzo il Magnifico, 1449 ~ 1492년). 코시모 메디치의 손자.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빛나는 통치자. 예술가와 학자들의 후원자. 그 자신이 시인기도 했다. 특히 라틴어보다 고향의 언어인 토스카나어를 더 좋아했다는 것은 이 시대에는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예술가들과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15세기 후반 피렌쩨 정신에 그 누구보다도 많은 기여를 했다. 플라톤 아카데미에는 그의 선생인 마르실리오 피치노, 인문주의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 항상 그가 가까이 두었던 시인 안젤로 폴리찌아노 등이 모여 있었다. 이 당시 그의 후원을 받았던 중요한 예술가들은 줄리아노 다 상갈로, 보티첼리, 베로키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세계적인 인물들이었다. 생애 말기에는 성 마르코 성당에 조각 학교를 열었다. 거기서 15살 먹은 학생이 그의 마음을 끌어서 데려다가 아들처럼 궁전에서 키웠는데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1490년에 그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추천을 받아 도미니크회 수도사 사보나롤라를 성 마르코 성당의 설교자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메디치 가문, 교황, 기독교 전체를 무시무시한 예언들로 끊임없이 공격하였다. 이때 이미 로렌쪼 일 마니피코는 병들어 누워있었다. 그가 이른 나이로 죽은 뒤 6개월 뒤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2년 뒤에는 똑똑하지 못한 프랑스왕 샤를 8세가 쳐들어와서 그로부터 반 세기 동안이나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뒤흔들어놓게 된다. 


53쪽 역주를 옮긴다. 이 글의 첫 머리에 로렌쪼 디 메디치의 시 구절을 옮겼기 때문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넓게 잡아 이백년 정도 지속된다. 예술사에서는 르네상스를 초기, 중기, 후기 르네상스로 나누고 14세기(Trecento 트레첸토), 15세기(Quattrocento 콰트로첸토), 16세기(Cinquecento 친퀘첸토) 초반까지를 그 범위에 둔다. 특히 르네상스 고전주의는 1500년초반 2~30년간 지속되다가 사라진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했던 시기도 그리스 문명이 몰락해가던 무렵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황혼'이라는 단어는 참 애잔하게 들린다. 로렌쪼 일 마니피코의 영향력으로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가 만들어지고 곧바로 사라진다고 할까. 이 점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유럽 전체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독립적이고 지역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천재들의 시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 기르를 가능하게 만든 천재들이 소수의 도시 국가에 집중적으로 등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르네상스' 편이 상대적으로 설명이 빈약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 사회적 배경이나 인과관계만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부르크하르트. 현재 스위스 1000프랑 지폐에는 부르크하르트가 들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