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혼돈의 기원, 로버트 브레너

지하련 2020. 7. 12. 16:56



혼돈의 기원 - 세계 경제 위기의 역사 1950 - 1998 (Turbulence in the World Economy)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지음), 전용복, 백승은(옮김), 이후, 2001  



갑자기 바빠진 탓에 책을 거의 읽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읽어야지 하면서 책을 읽는다(최근 감이 떨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불성실한 책읽기와도 관련 있는 것 같고 책을 읽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그만큼 세상은 복잡하고 너무 빨리 변한다. 제대로 된 시각으로 똑바로 살아가야 되는데.). 


오래된 경제학 서적이라 약간 듬성듬성 읽은 감이 없진 않으나, 책을 읽는 동안, 예전에 장하성 교수와 경실련이 주도했던 소액주주운동을 떠올리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천천히 진행된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기업들은 자본가들에게 돈을 빌려 과잉설비를 유지하고 생산 규모도 유지하며 경쟁에 살아남으려고 했다. 그러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당연한 결과), 결국 금융 자본은 그들이 투자한 돈을 보전하기 위해 일련의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활동의 집합체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이며 결국 금융 자본이 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주주자본주의'라든가 '지배구조의 투명성' 따위는 금융 자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였으며, 그것을 통해 죽어가던 기업들이 되살아 나거나 우리들의 임금이 올라가거나 실물 경제가 좋아지거나 하진 않았다. 도리어 중소기업과 대기업 간의 임금 격차는 더 심해졌으며, 실물 경제, 다시 말해 일자리 창출이나 생산성 측면에서 딱히 큰 기여도 하지 않는 금융 종사자들의 임금만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런 점에서 현대 경제에 대한 일련의 흐름을 기술한 이 책은, 한 편으론 유익하나 한 편으로 참 기분을 더럽게 만들며 한때 당연히 여겼던 어떤 것들로 인해 그릇된 결과가 나왔음을 알게 된다. 


경상대학교 정성진 교수는 로버트 브레너의 이 책이 가진 의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첫째, 브레너의 논의는 독점자본의 지배가 아니라 경쟁의 격화를 세계 경제 위기의 원인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독점과 정체 경향의 연관을 핵심으로 하는, 한 동안 우리나라에서 정통적 맑스주의 공황론으로 통용되었던 스탈리주의의 전반적 위기론과 과소소비설 및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

둘때, 브레너의 세계 경제 위기론은 스탈린주의의 붕괴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정치 경제학 이론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조절이론, 사회적 축적구조론, 혹은 신리카도주의 공황론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기도 하다. (...)

셋째,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으로 금융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의 문제, 즉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운동이 아니라 국제적 과잉생산의 문제에 주목하는 브레너의 논의는 그 자체로 'IMF위기' 후 진보진영의 '새로운 통념'으로 자리잡은 '신자유주의 책임론'에 대한 강력한 논박이다. (...)

- 정성진,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위 인용 중 세 번째 의의는 국제적 과잉 생산으로 인해 어려워진 기업이 금융의 힘을 빌려 버티게 되고 결국 국제금융자본의 투기적 운동에 전 세계 경제가 휘둘리게 되는 상황이라고 이해하면 된다(정성진 교수는 일반적인 '신자유주의 책임론'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이야기한 듯싶다). 다시 말해 기존의 기업 지배 구조가 기업의 창업자와 일반 주주로 구성되어 있다가 주주로 국가자본과 함께 국제금융자본이 주주로 참여하게 된다고 할까. 특히 각 나라의 환율 정책과 기축 통화 달러의 대응은, 애초에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각 국가별 대응이었던 탓에 세계 경제는 더욱 수렁으로 빨려들어갔음을 이 책의 귀결이다. 


금융과 부자들을 위한 황금시대 

(...) 수익성이 하락하고, 이자율이 상승하고, 불안정성이 가중되면서 장기간에 걸친 새로운 설비 및 장치 확충에 따르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투자자들의 유인이 증대된 것이다. (372쪽) 


1980년대부터 시작되어 1990년대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경제 환경으로 변화한다. 


첫째, 그 효과들이 동반한, 생산으로부터 벗어난 비생산적 지출로의 대규모 이동, 둘째, 그 효과들에 힘입어 완결된 소득과 부의 이례적인 재분배. 

1980~89년에 31,105건의 인수 합병이 있었고 그 총가치는 13조 4천억 달러에 달했다. (381쪽)


이 책 대부분은 미국, 독일, 일본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로버트 브레너가 보기에 이 세 나라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있으며, 이 세 나라만 봐도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다. 


한국의 IMF 사태가 일본 금융 자본이 자금 회수를 서둘렀기 때문임은 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이 장기 불황의 그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한국이나 동남아시아 때문이 아니라 미국 때문임을 일본 경제 관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일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에, 일본 경제가 그 때까지 세계 경제, 특히 미국 시장과 맺어왔던 독특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엄청나게 증가함에 따라, 일본 경제는 전후 최고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381쪽)


플라자 합의와 더불어 달러화 가치가 붕괴되었고 엔화 가치는 급상승하여, 일본 경제는 유례없는 압박에 직면했다. (384쪽)


1985년의 플라자 합의 이후 미국 경제 상황은 개선되나 일본과 독일은 거센 압박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1995년 역 플라자 합의를 하지만, 독일과 달리 일본은 긴 경제 불황의 시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 일본의 경제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 탓에 경제 불황이 시작되었고 계속 이어지고 있으나, 일본은 아직도 미국 꽁무리만 쫓고 한국이나 중국과 싸우려고 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는. (거시적 관점에서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지, 실제 경제 정책의 수립과 실행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질 수도 ...) 


로버트 브레너의 관점에서 국제 경제 위기는 과잉 생산과 과잉 설비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경쟁 격화를 지속한 탓에 생긴 것이며, 노동자의 임금 성장이 억제되고 노조 활동이 와해된 것도 심화된 경쟁 구도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고육지책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국제 금융 자본의 시대가 등장하였으며  세계는 과거에서부터 지속된 경제 위기를 그대로 남겨둔 채 신경제 체제로 들어서 버렸다. 이 점에서 장기 불황의 시대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체감 경제는 IMF 이후로 한 번도 좋아진 적이 없는 듯하고 이익을 얻는 누군가들가 있으면 그 이익만큼(혹은 드 이상) 잃어버리는 누군가들이 있다. 한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 경제 체계 안에서도. 


이 책이 나왔을 무렵인 2000년대 초반 나는 한창 주주자본주의라든가 투명성 따위에 현혹되어 있었다. 그 무렵 이 책을 구입하긴 했으나, 그 때 읽기에는 내 지식이 다소 부족하기도 했고 재미없는 경제학 서적을 읽기엔 인내심이 약했다고 할까. 최근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가령, 금융 경제 중심의 시스템)도 과거, 혹은 먼 훗날엔 이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금 이 시대도 다른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 


로버트 브레너는 장기호황 시대를 1950년부터 1965년, 수익성의 하락과 호황에서 위기로의 전환을 1965년부터 1973년, 그리고 장기 침체 시기를 1973년부터 1998년 현재까지로 구분한다. 미국, 일본, 독일이 침체에 빠져있던 1973년 이후부터 한국 등 동아시아 나라들은 고성장을 이루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가격경쟁력이었다. 그리고 가격 경쟁력은 저임금 생산 체제가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일본, 독일도 한동안 저임금 체제의 혜택에 힘입어 성장하였음을 브레너도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 되면 저임금은 기업 경쟁력의 핵심에 가까워 보인다. 국내 대기업들이 하청 업체의 단가를 후려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일본 기업의 종신 고용에 대한 로버트 브레너의 언급이 흥미로워 인용한다.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고 부분적으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인용이랄까. 단순 작업일 경우, 시간에 비례해 고용자의 능력이 향상된다고 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종신 고용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한 축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노동자들에게는 꾸준한 임금 증가가 발생했는데, 이것은 상대적 차원에서는 아닐지라도 절대적 차원에서는 매우 실질적인 것이었다.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종신 고용' - 약 55세가 되어 은퇴를 종용받기까지는 기업이 고용을 보장하는 것 - 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기업은 '종신 고용'으로 많은 혜택을 누렸다. 종신 고용 제도를 뒤집어 보면, 고용자들의 연공 서열을 일생에 걸쳐 동일한 회사에 근속한 기간으로만 계산하여 진급시키는 체계이기 때문에, 기업노조주의의 확산은 회사를 떠나느 조합원이 그 조합에서 달성한 연공서열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로 인해 고용자들이 회사를 떠날 가능성이 감속하고 그에 따라 일본의 기업들은 자신의 고용자들의 수련과 교육에 안전하게 투자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173쪽) 


이 책에서는 '내수 시장'이라는 단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그 전까지 글로벌 시장의 변화로 인해 위기에 빠진 국가 경제를 자국의 내수 시장이 되살리거나 지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수 시장의 크기가 경제 상황을 개선시키는 효과는 어느 정도 있을 지는 몰라도 위기에 빠진 경제를 다시 되살릴 순 없다. 도리어 미국, 독일, 일본의 경제 위기가 오게 된 계기는 이 세 나라가 맺고 있는 경제적 관계 때문이며, 그 관계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위기 상황이 더 나빠지기도 하고(일본), 개선되기도 한다(미국)는 점을 이 책에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다시 말해 내수 시장이 한 나라의 경제 상황에 미치는 영향은 수출입 활동과 비교하면 미미한 것이다. 현재 중국도 수출 경제를 내수 중심의 경제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 않고 도리어 불가능할 것이다. 


위 표를 통해 1960년대가 얼마나 풍요로운 시대였는지를 알 수 있다. 



로버트 브래너의 관점은 지금에서 볼 땐, 논쟁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이 책(논문)이 <<뉴레프트리뷰>>에 실렸을 땐 상당한 논란이 되었던 모양이다. 오랜만에 읽은 경제학 서적이라 나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너무 뒤늦게 읽은 것이긴 하나. 지금은 절판되었기 때문에 구하긴 어렵다. 그렇다고 지금 구해서 읽을 만하지도 않을 듯 싶다. 도리어 다른 경제학 서적을 읽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최근에 나온 다른 책을 읽어봐야 겠다. 



혼돈의 기원 - 8점
로버트 브레너 지음, 전용복 외 옮김/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