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예상 밖의 전복의 서, 에드몽 자베스

지하련 2020. 7. 12. 17:23



예상 밖의 전복의 서 (Le petit livre de la subversion hors de soupcon)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es(지음), 최성웅(옮김), 읻다 




글은 무엇이고 책은 어떤 존재일까. 그것의 시작은 어디이며 그 끝은 언제일까. 이 형이상학적 질문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끌어당기지만, 우리는 금세 그 힘으로부터 도망쳐 나온다. 어쩌면 포기일지도, 혹은 도망이거나, 실질적인 결론 없는 무의미에 대한 경악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드몽 자베스에게서 이 질문들은 글쓰기의 원천이며 삶의 의지이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향기다.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죽게 되는 미완 속에 우리를 내버려둔다. 우리에게 남은 공백은, 무언가를 쏟아야 할 곳이 아닌 견뎌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자리해야 한다. 

공허를, 무를, 여백을 인정하기.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모두 우리 뒤에 있다. 

나는, 오늘날 - 새로이 - 이 여백 속에서, 말도, 거동도,  단어도 없이, 있다.


문장 하나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하며, 놀라운 전율을 안긴다. 그것은 잃어버린 노래, 글과 책과, 그리고 그것의 시작에 대한 끝없는 공허와 고독이다. 


고독이란, 즉각 존재를 다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일컫지 못한다. 고독은 자신을 읽어낼 눈과 간격을 두고서만 기록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구두의 언어가 기술의 언어를 위하듯, 말은 글이 되기 위해 존재할 것이다. 말이 어느 고독의 끝을 감당한다면, 그 고독의 끝은 글을 위한 고독한 모험의 전주곡이다. 



문체는 고독이라는 무모함이며, 근심의 밀물과 썰물이다. 고독은 또한 자신의 새로운 기원에 비추어진 어떤 현실의 반영이며, 그 기원에서 우리는 혼잡한 욕망과 의심에 가득 차 영상을 본뜨는 것이다. 



한 권의 거룩한 책이 있는 게 아니라, 거룩한 책의 침묵에 열린 책들이 있는 것이다.

쓰기란, 이러한 침묵에서 시작하여, 영원의 책을, 우리의 변신이 담긴 필멸의 책으로 틈입시키는 일이다. 



아포리즘이 아니지만, 짧은 시적 단상은 이어져 하나의 찬란한 결론을 향한다. 그것은 신과 닿아있으며 침묵, 무를 넘어선 전무, 글과 문체, 사유와 무한을 너머 다시 책이 존재하기 이전의 책을 향한다. 말라르메적이면서도 동시에 반-말라르메적인 결론. 


에드몽 자베스의 이 책은, 내가 최근 몇 해 동안 읽었던 책들 중 가장 찬란한 책이다. 



에드몽 자베스 (1912 - 1991)



예상 밖의 전복의 서 - 10점
에드몽 자베스 지음, 최성웅 옮김/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