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새로운 충견들, 세르주 알리미

지하련 2020. 9. 20. 00:36



새로운 충견들 Les nouveaux chiens de garde 

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지음), 김영모(옮김), 동문선, 2005년(1997년) 




“우리는 철학자의 가면에 인정된 존경이 결과적으로 은행가의 권력에만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영원히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 폴 니장, <<충견들>> 중에서 



‘1932년 폴 니장은 ‘자기 시대의 부도덕한 시사 문제’에 대한 자신의 참여를 위대한 개념 더미 아래로 숨기기를 좋아하는 철학자들을 고발하기 위해 <<충견들>>이라는 에세이를 썼다(11쪽).’ 약 60여년 후인 1997년 세르주 알리미는 권력과 자본주의를 위한 매끈한 이미지를 제공하며 공모를 일삼는 기자들, 저널리스트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그리고 2020년 기자라는 정식 명칭 대신 ‘기레기’라는 혐오스러운 별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읽는 이 책의 울림은 작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매끈한 이미지를 제공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다.”  
- 파트리크 푸아브르 다르보르(프랑스 기자이자 앵커.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앵커들 중 한 명) (13쪽) 


권력이나 자본에 충돌하지 않고 모든 점에서 사회 계급의 이해관계에 일치하는 이미지, 그것이 매끈한 이미지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지금 한국의 신문이나 방송, 우후죽순 생겨난 듣보잡 인터넷 미디어를 보여주는 듯하다. 


“정치부 기자는 권력 기관에 있는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을 원하며, 정보를 얻는다는 구실로 이들과 친분 관계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은 정치부 기자들을 아첨꾼으로 만들고, 이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일을 하지 않는다. 이 정치부 기자들은 권력에 접근하며,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스스로 느끼기 이것에 만족한다. 장관이 군중 속을 헤쳐 나가고 군중과 악수를 할 때, 이것은 이들에게 정말 기쁜 일이다. 또한 이들은 여기에서 조그만 이점을 얻으려고 애쓴다. 예컨대 주차 위반 벌금의 면제, 아이들의 유아원 자리, 파리 시 덕분에 비싸지 않은 아파트의 임대 등 ….” (22쪽) 


구독률, 시청률, 클릭률의 문제다. 돈의 문제다. 결국의 생계의 문제다.


기자들이 비록 자신들의 사주, 편집국장, 시청(구독)률, 직업의 불안정, 경쟁, 공모(共謀) 사이에서 꼼짝달싹 못하며, 더 이상 자율성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이들은 자신의 동지 앞에 보여 줄 자신이 작성한 신문이나 방송에 ‘게재하거나 내보낼’ 기사나,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게 될 기사를 여전히 찾고 있다. 직업 세계에서, 예컨대 밀수에서 장물아비에게 물건을 팔아 넘길 때 주고받는 간단한 말이나 서로의 이견에 대한 조정을 짧은 시간 내에 끝낼 수 없다는 것은 가장 큰 무능력에 속한다. 아울러 언론사 사주에게도 기자들에게 압력밥솥의 밸브처럼 청량제와 같은 자신들의 별볼일 없는 권위를 양도하지 않는 것, 말하자면 기자들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조차도 해주지 않는 것 또한 일종의 서투름에 속하는 일일 것이다. (15쪽) 


하지만 기사를 읽는 독자가 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심지어 기자 스스로도 그 사실을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황금빛 전설을 쓰면서, 프랑스 기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정치 권력과의 관계 발전만을 강조한다.'(53쪽) 


기자들은 늘 언론의 자유를 외치지만 실은 권력과 자본주의에 기생하기 위한 편의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할 뿐이다. 한 때 언론의 자유가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언론의 자유와 언론의 실제 행동은 판이하게 다르다. 


실제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자들은 거의 언제나 구속이라는 복장을 하고 엄격하게 규제를 받고 있었다. 지난 세기 동안 언론의 자유는 언론을 소유한 사람에게 속해 있었다. 언론을 소유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언론의 자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침묵’이었다. (68쪽) 


권력의 추구, 자본 앞에서의 신중함. 물론 이러한 프랑스 언론의 이중적 의존은 이미 위축된 복수 체라는 조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모든 이데올로기적 설비는 이미 권위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통치를 더욱 튼튼하게 한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취재한 주제들과 언제나 집중 공격을 받는 비-주제들의 총체는 규격에 들어맞는 사고의 왕국을 확장한다. (71쪽) 



세상에 대한 망각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이 망각은 또 다른 세상을 건설하기 때문이다. “기분 전환을 하게 만드는 다양한 사건”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찮은 것, 즉 나머지의 일탈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구독률(시청률) 또한 이데올로기이다. 따라서 마르셀 트리야와 야니크 르트랑샹은 매분마다 시청자들에게 실시한 여론 조사 덕택에 프랑스 제 2TV 방송의 뉴스 보도국이 진행해야 될 뉴스와 피해야 할 뉴스를 알게 되었노라고 설명했다. (74쪽) 


세르주 알리미의 이 책은 지극히 프랑스적이지만, 지금 한국 언론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한 미국 노조원은 미국의 기자들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목했다: “20년 전에는 기자들이 우리들과 함께 카페에서 저녁을 먹었다. 오늘날에는 이들이 사업가들과 저녁을 먹고 있다.” 저널리즘은 ‘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자’들과만 회동하면서, 고위층과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길을 잘못 들어놓으면서, 경제적 사고의 선전 기계로 전락하면서 지배 계급과 특권 계급이라는 계급 제도에 갇혀 버렸다. 저널리즘은 공공 토론의 퇴화를 재촉했다. 이러한 상황은 저널리즘 체계의 특성이다. 아울러 저널리즘 본분의 코드는 이러한 상황에서 큰 것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폴 니장이 일컬었던 “부르주아적 사고에 민감한 학자들이 정리하는 온순한 개념들”에 대하여 각성하는 것은 저항의 한 형태로 간주할 수 있다. (161쪽) 


모든 언론인들이 이렇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출간되었던 1997년과 지금과는 언론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기존 언론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놓고 언론인이 아닌 이들의 영향력도 높아졌다. 그러면서 언론은 하향평준화되었다고 할까. 심지어 인터넷으로 검색되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맞춤법조차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교정/교열 기자가 별도로 있었으나, 지금은 실시간 송고 시스템이다 보니, 기사가 가져야할 기본적인 덕목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언론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기자나 언론인의 권리를 요청하는 꼴불견이랄까. 하지만 세르주 알리미의 진정한 의도는 아래와 같다. 


아울러 이 책은 자신들의 직업을 성실히 수행하지만, 일부 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실추된 이미지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기자들을 위해 씌어진 책이다. (10쪽) 


그리고 지금도 진실을 위해 권력과 자본주의와 거짓과 싸우는 전 세계의 많은 기자, 언론인들이 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한국에도 그런 기자들이 있음을! 


일반적으로 ‘권력-견제’에 대한 환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연마된다. 지금까지 가장 장관인 것은 기자들의 살해라는 비극적인 일이며, 이것 또한 진실이다. 10년 전부터 1백 73명의 기자들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살해되었다. 가장 흔한 기자들의 죽음의 원인은 군대에 의한 살해였고, 이러한 군인들에 의한 살인 행위는 항상 그 처벌이 면제되었다. 전쟁터에서 살해된 특파원 숫자 또한 엄청나다. (16쪽) 


참고로 이 책은 잘 읽히지 않는다. 불어를 그냥 투박하게 옮겨서 한글화가 덜 된 느낌이랄까. 그리고 프랑스 언론 환경을 언급하기에 너무 많은 고유명사가 등장하는 것도 독서를 어렵게 한다. 


- 세르주 알리미Serge Halimi 



새로운 충견들 - 8점
세르주 알리미 지음, 김영모 옮김/동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