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하련 2020. 10. 4. 14:17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사 놓은 지 한참 만에 이 책을 읽는다.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뭐랄까. 자신의 삶에, 일상에, 지금/여기에 대한 만족과 찬사, 행복과 신비에 대한 온화하고 밝고 서정적인 서술들과 표현들로 가득한 이 책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이런 책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결국 읽기는 했으나,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깊이 이 책에 빨려들지 못했다. 매혹당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달리, 나에겐 그저 좋은 산문집이었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산문집은 기싱의 <<헨리 라이크로프트의 수상록>>이나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같은, 세계와 자신과의 거리가 다소 떨어진 채 삶과 세계에 대한 믿음없이, 젖은 눈길로 바라보는 느낌의 ... 


하지만 가끔 나오는 메리 올리버의 시는 이 거북스러운 독서의 작은 위안이 된다. 


여리디여린 아침



여리디여린 아침이여, 안녕 
오늘 넌 내 가슴에 
무얼 해줄까?
그리고 내 가슴은 얼마나 많은 꿀을 견디고 
무너질까?


이건 사소하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 : 달팽이 한 마리가 
격자 모양 잎들을
푸른 나팔 모양 꽃들을 기어오른다.


분명 온 세상 시계들은 
요란하게 똑딱거리고 있을 거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달팽이는
창백한 뿔을 뻗어 이리저리 흔들며
손가락만 한 몸으로 느릿느릿 나아간다.
점액의 은빛 길을 남기며. 


오, 여리디여린 아침이여, 내 어찌 이걸 깰까?
내 어찌 달팽이를, 꽃들을 떠날까?
내 어찌 다시 내성적이고 야심 찬 삶을 이어갈까? 


메리 올리버는 너무 자연주의적이다. 자연에 대한 찬사는 종종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하다. 잊고 있었던 스웨덴의 신비주의자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다시 살펴보았을 정도로. 


하지만 새벽은 - 새벽은 선물이다. 하루의 문이 열리는 이 시간에는 열정이나 무관심으로 자신의 많은 걸 드러내게 된다. 새벽을 사랑하고 새벽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은, 나에게 낯선 존재일 수가 없다. (46쪽) 


고독은 잎과 빛, 새소리, 꽃, 흐르는 물의 세계에 솔직하고 기쁘게 감응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47쪽) 


때때로 땅은 휴식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특히 가을이 되면 고요해지고 정지 상태에 이르려는 성향을 보인다. 바다는 따스함을 간직하고, 높은 하늘의 흰 구름 배들은 서쪽으로부터 움직인다.(147쪽) 


강물이 조약돌을 굴리던 광경들, 

야생 굴뚝새들이 통장에 돈 한 푼 없으면서도

노래하던 소리를

꽃들이 빛으로만 된 옷을 입고 있던 모습을. 

- <달력이 여름을 말하기 시작할 때> 중에서 (65쪽)


그리고 책의 나머지 부분은 문학과 작가, 작품에 대한 짧은 글들이다.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 폭풍우 때 우리는 무언가 해야만 한다. 어디론가 가야만 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느낀다. 역경, 심지어 비극도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스승이 된다. (61쪽) 


문학의 최고 효용은 제한적인 절대성이 아니라 아낌없는 가능성을 지향한다. 문학은 답을 주기보다는 의견, 열띤 설득, 논리, 독자가 자신과의 싸움이나 자신의 곤경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이 에머슨의 핵심이다. (78쪽) 


호손은 악과 그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무기력, 의심, 절망, 지독한 야심 등 양심이 성취한 것을 파괴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적 나약함과 허영에 관한 최고의 상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제는 악의 다양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다. (92쪽) 


책은 얇고 집중해서 읽는다면 두 세시간이면 완독할 수 있는 분량이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여러 번 읽기 좋지만, 서울과 같은 도시에서 읽을 땐, 이 거대하고 번잡스러운 도시가 싫어질 수 있다. 하긴 우리가 몇 십만 명 이상 되는 도시에세 살기 시작한 것은 채 백년도 되지 않는다는 걸 기억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자연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현대의 비극일 지도 모르리라. 그 비극 속에서 모더니스트들은 의식의 흐름이라든가 소격효과를 만들어낸 것이겠지만. 


검색해보니, 메리 올리버의 부고 기사가 뜬다. 주위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런 소식도 뒤늦게 알게 된다. 메리 올리버의 글은 좋고 책은 따뜻하다. 다만 그것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할 뿐. 


메리 올리버Mary Oliver(1935 ~ 2019)




완벽한 날들 - 10점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마음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