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잃어버린 낙원, 세스 노터봄

지하련 2021. 2. 1. 13:14




잃어버린 낙원 Lost Paradise 

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지음), 유정화(옮김), 뮤진트리 



어쩌면, 나는, 너는, 우리는, 늘, 언제나, 각자만의 천사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로 설정된 소설은 또 다른 '잃어버림'으로 끝을 맺는다. 알마의 상실감(상처)은 본원적인 것이어서, 애초에 무드Mood같은 것으로 인해 일상을 벗어나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는 일로 이 소설, 혹은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일은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일종의 은유적인 형태의, 소설적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 정도이며, 이 사건에 대한 서술이나 표현, 또한 직접적이지 않고 마치 꿈처럼 흐릿하게 서술되어 독자는 그 사건의 끔찍함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소설을 만드는 두 개의 이야기, 알마가 알무트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이야기와 에릭 존다크가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에서 엔젤 프로젝트Angel Project에 참여하는 이야기는 알마와 존다크가 서로 만나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에릭은 알마를 천사로 만나고 독일에서 다시 만나지만, 그것은 이 소설의 중심 사건이라고 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국 이 소설에서 사건(들)은 제대로 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떠돌며 마치 꿈처럼 읽힌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여러 공간이 중첩되며 모호한 표현과 서술이 이어져 어느 것이 현실인지, 독자는 종종 길을 잃는다. 어쩌면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세스 노터봄이 이야기하고 싶은 어떤 것의 알레고리가 아닐까. 





그들은 끝없는 꿈을 꾸었소. 그 꿈 속에서 삶은 언제까지 지속되는 영원이었다오. 아무 것도 바꿀 필요가 없는 삶. 옛날 옛적에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생명체가 왔소. 그리하여 그들이 계속 꿈꾸는 게 허용되었소. 정령이 다스리는 세상. 마법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설령 우리가 그 일부가 되고 싶다 한들 들어갈 자리가 없는 마법 같은 체계라오. (88쪽)


알무트와 알마가 찾아가는 '시크니스 드리밍 플레이스Sickness Dreaming Place' 또한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소설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풍광으로, 지금도 에버리지니(*호주 원주민)에게는 태고의 낙원이고 관광지가 아니라 예술가, 선지자의 본향'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 장소가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 아니면 상상의 공간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고는 잡지를 덮고 금세 잠에 빠져든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이들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도 평화롭게 잠들 수 있는 이들이. 그녀의 한 손은 책 위에 놓여있고 다른 손은 목덜미,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 뒤에 받쳐져 있다.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수수께기는 평생동안 내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그 사연이 무언지 영영 알아내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이 책은 덮혀진 채로 남겨둘 것이다. (13쪽) 


소설의 도입부는 어떤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작가 자신의 에피소드로 읽힌다. 그리고 이 소설의 끝은. 


열차 시각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바르샤바 센트랄나 20:55, 민스크 08:49, 스몰렌스크 14:44, 모스크바의 벨로루스카야 20:18.' 다양한 여정, 다양한 기차. 나는 상실의 빈자를 채우고자 여행을 떠난다. 책을 써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기분을 이해할 것이다. 작별 같은 것, 그러므로 여행은 늘 애도의 형식을 띤다. (230쪽) 


결국 여행으로 귀결된다. 세스 노트봄이기 때문에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일테니.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빗대어 자신의 잃어버리고 찾는 여정을 그린 이 소설 <<잃어버린 낙원(Lost Paradise)>>는 우리 주변에 있는, 우리만의 천사(Angel) 이야기다. 나의 천사, 너의 천사. 그 천사를 찾아 떠나는 여행. 어쩌면 우리 삶의 여정이 그럴 지도 모른다. 인생은 태어남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나는 어떤 여행.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이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지만 내가 영원히 방랑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을 나의 사막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게는 평생을 계속해도 좋을 만큼 충분한 생각거리가 있다. (129쪽) 

 

그 여행은 나만의, 너만의 궤도가 될 것이니, 그 궤도 위로 자신만의 사막이 펼쳐질 것이다. 그 사막에 누군가가 방문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 방문자가 나만의 천사라면... 


***


Cees Nooteboom 


최근 세스 노터봄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고 있다. 좋은 일이다. 한동안 세스 노터봄을 집중적으로 읽을 듯 싶다. 


나는 항상 사람들이 무얼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이 경우 '사람들'이란 주로 '여성들'을 뜻한다. 이제 남성들은 책을 읽지 않게 되었으니까. (10쪽) 


나는 노터봄의 저 궁금증을 지나, 주위에 책 읽는 사람들을 두고 싶다. 어느 순간 주위를 살펴보니, 책 읽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노터봄이 태어난 네덜란드에는 산이 없다고 한다. 그냥 평지, 그것도 바다보다 낮은 평지라니... 가고 싶어진다. 




잃어버린 낙원 - 8점
세스 노터봄 지음, 유정화 옮김/뮤진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