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다 좋은 세상, 전헌

지하련 2021. 10. 2. 16:58

 

다 좋은 세상

전헌(지음), 어떤책

 

 

1.

‘다 좋은 세상’이라니.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좋은 세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하는 전헌 교수의 이야기가 설득력 없는 건 아니지만,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젊은 날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 다 좋은 세상이라 이야기하고 하지만, 그러나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아마 최악의 조건에 놓은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안다면, 그는 이런 말을 쉽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약육강식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옛 철학자들의 문장들만 나온다. 이 책은 일종의 철학 교양서적으로,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다 좋은 세상’과 저자가 생각하는 의견들로 이루어진 (흥미로운) 산문집으로만 머물 뿐이다.

 

2.

어쩌면 ‘실천학’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다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나, ‘다 좋은 세상’이라고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한 우리 모두의 실천학 말이다. 마치 전 세계적인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며 대응책을 모색하는 책들처럼.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지점은 '무엇을 아느냐'가 아니라고 '무엇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이다. 따라서 이 책은 ‘다 좋은 세상’임을 알게 할 순 있어도 그 앎이 비참한 현실을 개선시키지 못한다는 데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책은 인식과 해석의 문제로 귀결되지, 이 책을 읽는 나나 너, 우리, 독자들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3.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익히 읽어오던 철학책의 논조와는 상당히 다르다. 동서양 고전을 오가며 '다 좋은 세상'이라는 그의 생각과 대비되는 철학자들 -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등 - 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 비판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철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춘 이들에겐 재미 있을 것이다.  그는 감정과 이성은 하나라고 이야기하며 퇴계와 스피노자를 언급하며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퇴계와 스피노자의 정학(情學)은 감정이 공부해야 한다고 보는 데 반해, 20세기 지구촌 철학의 기초를 세우고 여타 대안을 섬멸한 소위 칸트의 비판철학은 외물(外物)이 공부를 이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고가 수단으로 목표하는 것은 직관이다. 그런데 직관은 오로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만 생기며, 다시금 그러나 이런 일은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대상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촉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그런데 칸트는 외물의 외형(外形)만 알 수 있을 뿐, 그 알맹이인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해요. 이것이 자칭 순수한 이성의 지당한 결론이라고 말입니다. (95쪽 ~ 96쪽)

 

칸트 철학을 비판하고 아리스토텔레스도 홉스를 인용하며 부정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20년을 사사한 스승 플라톤과 사별하자마자 돌아서서 학문을 다시 전쟁의 수단으로 삼고 체계화합니다. 토마스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공허한 철학과 허구의 전설”이라는 명언이라고 한탄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만큼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없고, 또 그의 정치학만큼 통치에 모순되는 것도 없으며, 그의 윤리학만큼 무지한 주장도 없다. - 홉스, <<리바이어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전승한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 정복에 나섰다 인도에서 전사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감정학을 행동학으로 오인한 포스트모던의 기수 들뢰즈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a)은 도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것은 도덕을 하나의 행동학(Ethologie)으로서, 즉 이 내재생의 평면 위에서의 빠름과 느림의 결합으로서, 변용시키고 변용하는 능력들의 결합으로 사융한다. -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헤겔의 후예 후쿠야마가 실상 자유경쟁 시장경제가 전쟁 정신의 최후 승자라고 밝히며 <<역사의 종말>>(1989)을 선언한 지 오래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쟁의 종말 없는 지속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자유 경쟁 시장경제는 전쟁정신도 아니고 전쟁체제도 아닙니다. (86쪽 ~ 87쪽)

 

4.

퇴계와 스피노자는 다 좋은 세상의 알맹이가 사람의 감정인 것을 각기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일관된 논리에서 확인하고 논증한 학자입니다. (109쪽)

 

책은 짧지만, 저자의 주장은 강렬하며 확신에 차 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우게 되는 철학사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주장함으로, 상당히 흥미롭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판하고 칸트로 비판한다. 꼼꼼히 읽는다면 그의 주장에 묘하게 이끌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야기하는 ‘다 좋은 세상’이라는 의견에 완전히 공감하지 않는다.

 

5.

얼마 전, 평생 정신과의사로 일하다 은퇴한 분의 초대로 어느 모임에 나갔습니다. 그때도 늘 하던 대로 다 좋은 세상 얘기를 했더니 정신과의사 분의 기색이 무거워졌습니다.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런 표정을 짓는 얼굴들을 가만 보면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말이나 돼? 아니, 살아 본 사람이 왜 그래? 하루를 넘기기가 무섭게 끔찍한 일, 싫은 일, 나쁜 일을 밤낮 겪는 게 인생인데, 어쩌자고 다 좋은 세상이라고 그래?’ (12쪽)

 

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책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상처와 고통은 가깝고 행복은 멀다. 상처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낸 이의 면전에서 ‘다 좋은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심하게 이기적이라고 여긴다. 학문적인 관점에서의 그의 주장은 설득력 있을 지 모르지만, 평범한 우리들의 삶에서는 한참 떨어져 있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하고 불안한 미래를 두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저자가 이야기하는 ‘다 좋은 세상’은 사치에 가깝다. 차라리 비트겐슈타인의 냉정한(혹은 극단적인) 합리성의 철학이 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왜냐면 비트겐슈타인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포기하고 한계를 명확히 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평화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 참고) 전헌 교수 인터뷰 

https://www.jsd.or.kr/?c=boards/board&uid=18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