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하련 2021. 10. 11. 01:51

 

미래를 말하다 The Conscience of a Liberal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지음), 예상한, 한상완, 유병규, 박태일(옮김), 현대경제연구원BOOKS, 2008년

 

 

‘미래를 말하다’라는 번역서의 제목은 어울리지 않는다. 폴 크루그먼이 미래를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 않고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어떤 조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대신 이 책을 통해 지난 약 백 년간의 미국 정치 지형의 변화와 이로 인해 심해진 경제적 불평등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한국 사회도 미국 사회와 비슷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고 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8년도에 번역 초판이 나오고 2009년에 나온 32쇄본이다. 엄청 팔린 책인 셈이다. 폴 크루그먼의 지명도 때문일 테지만, 많은 이들이 이 책을 구입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의외로 여겨진다. 더구나 개정판이 나올 정도니, 한국 사람들이 미국 정치/경제사에 이렇게 관심이 많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처럼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말하는 미래가 궁금해서 산 건 알 턱없지만, 잘 알지 못했던 미국 상황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미국처럼 양당 체제가 공고화해지고 극우화되는 보수야당의 모습이 미국과 같아서 흥미롭게 비교하며 읽을 수 있었다. (지금 찾아보니, 개정판도 품절 상태이긴 하지만)

 

저자는 진보주의(liberalism)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보수주의(conservatism)을 비판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상당히 정치적이며, 이 점에서 저자의 노선은 분명하다. 책의 결말부에서 그는 '당파성'을 이야기할 정도이니.

 

정치학자 놀런 매카티(Nolan McCarty), 키스 풀(Keith Poole), 그리고 하워드 로젠탈(Howard Rosenthal)은 역사는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하나가 되어 일종의 ‘춤’을 춰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들 학자는 국회의원들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복잡한 통계 기술을 사용했다. 그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화당이 진보적이 되어 민주당과의 의견 차를 좁히면 소득 격차가 줄고, 1950~60년대에 보았던 것과 같은 초당적 제휴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화당의 우파 성향이 강해지면 오늘날과 같이 양당의 양극화가 깊어지고 소득격차도 확대된다. 그렇다면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양극화가 같이 춤을 추도록 만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20쪽 ~ 21쪽)

 

실제로 미국 전후 중산층 사회는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행정부 정책의 일환인 전시 임금 통제를 통해 몇 년이 채 안 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이 놀라운 사실을 처음 주장한 경제사학자인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과 로버트 마고(Robert Margo)는 이를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고 불렀다. 독자 여러분들은 아마 전시통제가 사라지자마자 불평등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루스벨트 행정부가 이뤄낸 비교적 평등한 소득 분배는 그 후로도 30여년 이상 지속됐다. 이는 제도와 규범, 그리고 정치적 환경이 소득 분배에 끼치는영향이 우리가 경제학 입문 과정에서 배운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객관적인 시장의 힘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23쪽)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은 언제나 선거철만 되면 ‘경제가 문제다’라고 말하지만, 실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늘 문제다. 즉 그들 정치인이 문제인데 왜 경제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정치만 제대로 돌아간다면 한국의 경제는 순항할 것이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저자의 입장은 책 초반에 그 윤곽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공화당의 우경화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결과로 나타났다. 루스벨트 행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 그것이 경제공황과 전시 상황이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으나, 그 효과는 전후에까지 이어지며 미국의 가장 안정적인 시대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케인즈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낸다고 할까). 이 책은 이 주장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각 연대별로 미국 정치 상황이나 경제 여건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어떻게 현재의,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된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는 건 아니고 미국의 보수주의를 공격하기 여념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21세기 초 미국의 여러 모순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보수주의자인 반면,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급진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333쪽)

 

다시 말해 진보주의는 복지국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와 법치도 추구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피부색이나 종교, 성적 취향이 다른 시민들에게 똑 같은 권리를 부여하기 꺼리는 일부 시민들을 이용하는 정치적 전략을 핵심으로 한다. 이 책에서 기록한 것처럼 보수주의 운동은 애초부터 반민주적이며 권위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335쪽)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었는데, 그건 1960년대 미국 사회에 대한 것이다.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하다 보면 1960년대 미국 히피 문화나 팝 아트에 대해서, 향수나 부러움의 눈길로 보게 되는데, 실제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미국인 다수, 어쩌면 대부분에게 꾸준한 경제 발전이 가져다 준 만족감보다 미국 사회가 붕괴되고 있다는 불안감이 훨씬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범죄율은 높아졌고, 도시는 폭동으로 폐허가 됐다. 풍요의 시대에 자란 젊은이들은 머리를 기르고, 마약을 복용하며, 혼전 성관계를 맺었다. 거리 곳곳에서는 베트남전을 비난하는 시위참가자들을 볼 수 있었다. 현재의 역사가들은 1960년대의 혼란 속에서 두 가지 경향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강도들을 움직이는 것, 급진적인 학생들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히피들이 움직이는 이유와 중년층 반전 운동가들이 움직이는 이유는 절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사회분위기는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108쪽)

 

아! 그 사랑이 가득했던 여름! 특정 연령의 미국인들, 곧 그들의 젊은 시절이나 그때 당시 원했던 삶을 회고해보는 베이비부머들에게 1960년대는 일종의 향수로 다가온다. 그러나 젊은이들의 대항문화(counterculture)에 대한 당시 미국인들의 반응은 대부분 감탄이 아니라 공포와 분노였다. (124쪽)

 

실제로 실업률이 3.5%에서 6%까지 올랐던 1969~71년, 닉슨 통치 하의 경기침체는 알타몬트(Altamont, 성공적인 우드스톡 페스티벌 몇 달 후 열린 페스티벌로 살인과 강간, 마약 문제로 얼룩졌던 행사 - 역주) 페스티벌에서 살인도 막지 못했고, 히피운동을 저지하지도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25쪽)

 

미국의 중산층이 무너진 지는 오래되었다. 한국도 그 비슷해 보인다. 예전과 달라졌다.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가 심각해지고 있으며, 서울과 수도권과도 격차가 생기며, 서울 안에서도 강남과 비강남의 차이가 심각해지고 있다. 어쩌면 이 현상은 전세계적인 현상일 지도 모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폴 크루그먼에게 그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보적인 정권과 적극적인 시장 개입, 그리고 복지 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그것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미국 역사에서 그랬던 시절, 그나마 살기 좋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나 부모님의 지위가 더 중요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 RDK, 즉 ‘멍청한 부잣집 아이들(rich dumb kids)’이라고 부르던, 성적이 하위 25%이면서 부모님의 지위가 상위 25%에 속하던 학생들은, 성적은 상위 25% 안에 들지만, 부모님의 지위가 하위 25%에 속하는 학생들에 비해 대학을 졸업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연구결과를 종합해보면 우리가 평등한 기회 비슷한 걸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3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