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2월을 물들이는 스산함, Hoc erat in votis

지하련 2022. 2. 18. 12:14

 

조지 기싱

 

우리에게 삶의 희망이나 목적 같은 건 없고 사랑이라거나 미래 따윈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치열하게 글을 쓴다는 건, 그렇게 노력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 아주 오래 전 조지 기싱George Gissing의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을 읽은 다음의 내 감상평이었다. 늘 다시 읽고 싶은 책이지만, 늘 다른 책들에게 밀려 손 안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서가 사이로 돌아가지만.

 

어쩌면 시의적절한 포기는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결은 아닐까. 아는 분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너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니'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멈칫 했다. 글쎄, 나는 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지금 다니는 회사를 코스닥 상장까지 시키는 것, 또는 생계 걱정을 하지 않을 만큼의 물리적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것, 아니면 아이를 대학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려는 것, ... 대답들이 줄줄 흘러나왔으나, 뭐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다시 물었다. 그것이 나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생애 처음 죽음을 꿈꾸었을 때, 나에게 한없이 실존주의자들의 부조리함이 휘감고 돌 때, 베르그송의 '엘랑비탈elan vital'이 나를 끄집어 올려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였으며 나는 지속적으로 방황하였고 계속 실패했다. 어쩌면 아직도 실패 중일 지도. 

 

퇴근 전 프로젝트룸에 남은, 나이 어린 동료들 - 대부분 미혼 여성이었던 - 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영국에서 조사를 해보니, 죽을 때까지 싱글로 사는 여성이 가장 행복하더라고. 그러니 여성들에게 결혼은 권장할 만하지 않다고. 여기에 덧붙여 연령대로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가장 행복한 나이는 죽음을 앞둔 70대나 60대라고. 그러니 젊었을 때 늙는 것이나 앞으로 다가올 죽음을 두려하지 말라고. 그리고 결혼을 하려면 빨리 하라고. 그래야 중년 이후 삶이 편해진다고(아닌 경우도 있지만).

 

그런데 나는 저 이야기를 왜 했을까.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막상 나이가 들고 보니, 죽음이 딱히 두렵지 않다. 죽음의 풍경이 단절된 현대 문명이 이럴 진대, 죽음이 눈 앞에 널려 있던 현대 이전 시대에는 어땠을까. 굳이 필립 아리에스Philippe Aries를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번 대선의 풍경은 언제나 내 마음을 어둡게 한다. 기형적인 여론조사 결과나 언론의 편향된 보도, 잘못된 후보를 올려놓고 지지해달라고 하는 거대 야당의 천연덕스러움은 이 나라에 과연 미래는 있는가 되묻게 된다. 또한 이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젊은 이들을 만나면, 과연 니들이 말하는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되묻게 된다. 아! 그러나 대부분 관심 없다. 매번 강조하지만, 한국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가 문제다. 정치만 잘 되면 경제는 문제 없다. 일본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경제가 힘든 것이다. 

 

 

온라인으로 영문판을 구해 읽을 수 있다. Hoc erat in votis. 바라는 것들 중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