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 러셀 저코비

지하련 2022. 8. 14. 16:38

 

마지막 지식인 - 아카데미 시대의 미국 문화
The Last Intellectuals - American Culture in the Age of Arademe

러셀 저코비Russell Jacoby(지음), 유나영(옮김), 고유서가 

 

 

지식인의 위기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어느 순간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던 지식인들이 사라졌다. 어떤 이유로 사라진 것일까. 이 책은 미국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서술하고 있으나, 한국 뿐만 아니라 서유럽 국가나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도 해당될 것이다. 각국마다 사정을 다를 테지만, 예전과 달리 다양한 시사 문제에 대해 글을 써서 공적인 담론을 형성하며 비판적 여론을 불러일으키던 지식인들이 천천히 사라졌다. 저자는 이러한 '공적 문화의 빈곤화'를 이야기하며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정력적으로 명쾌하게 글을 쓰는 지식인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저렴한 집세만큼이나 드물다. 초대형 대학들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도시의 거리와 카페에서 성장한 "마지막" 지식인 세대는 교양 있는 독자들을 상대로 집필 활동을 했다. 그들은 첨단 기술 지식인과 컨설턴트와 교수들 - 더할 나위 없이 유능할지 모르나 공공의 삶을 살찌우지는 않는 익명의 존재들 - 로 교체되었다. 젊은 지식인들은 거의 캠퍼스 안에서만 생활을 영위하며 프로페셔널한 동료들을 상대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접할 수 없고 그들을 알지도 못한다. (8쪽) 

 

그에게 지식인이란 직접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글을 쓰고 만나고 이야기하는 이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이해할 때 대학교수나 언론사 기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아카데미 안에서 아카데미의 동료들과 전문 저널 속에서만 소통하는 교수들은 러셀 저코비가 언급하는 지식인에 속하지 않고 도리어 지식인의 퇴보된 형태에 가까워 보인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상황도 비단 다르지 않다. 거의 모든 대학마다 인문학과 과련된 학과들이 있고 여기에 교수들이 있을 텐데, 우리 대부분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어떤 연구를 하며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그들 대부분은 일반 대중을 위해 글을 쓰지도, 대중 앞에 서지도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그 어떤 통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며, 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이미 그들은 '지식인사회'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적 문화의 빈곤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최근의 일이다. 불과 반 세기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고 러셀 저코비는 말한다. 그러면서 현실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던 지식인들이 어느 순간 대학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 현상에 대해 개탄한다. 그는 미국에서 루이스 멈퍼드(1895 - 1990), 에드먼드 윌슨(1895-1972), 라이오넬 트릴링(1905-1975) 등을 대중에게 직접 이야기한 마지막 세대라고 말한다. 

 

책은 다소 반복적이며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대학의 성장과 발달로 지식인들은 어느 순간 대학 시스템에 자신의 미래와 생계를 맡겼다. 대학은 그 나름의 시스템과 정책, 정치적 고려 등을 모아서 대학 사회와 잘 어울릴 만한 이들만을 남겨놓는다. 대학 교수들은 대중을 향한 저널 같은 곳에는 글을 거의 기고하지 않고(그런 잡지들도 많이 사라졌다) 전문 학술 저널 위주로만 글을 쓰고 동료 교수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는 좌파든 우파든 가리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사상가 프레드릭 제임슨을 언급하며 아래와 같이 적는다. 

 

 

루이스 멈퍼드, 맬컴 카울리 등 지난 날의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비평가들이 한 번도 대중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제임슨은 한 번도 대중을 찾아 나선 적이 없다. 그의 저술은 세미나를 염두에 두고 집필된 것이다. 

제임슨의 저작이 이미 상당량의 이차 문헌을 낳았다는 사실은 이러한 변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멈퍼드나 윌슨이나 트릴링을 읽기 위해 독자를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 없었던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들이 그들 자신을 가장 잘 소개하는 해설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읽히기 위한 글을 썼다. 하지만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이 나오고서 3년 만에, 한 대학 출판부에서는 초심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을 펴냈다. 이 책, <<제임슨, 알튀세, 마르크스: "정치적 무의식"의 이해>>는 학계에서 펼쳐지는 변칙적 술수의 풍경을 고수란히 보여준다. (239쪽)

 

 

문학이나 철학의 영역에서만 이렇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많은 부분에서 지식인의 후퇴, 또는 사라짐이 목격되고 있다. 이것은 지식인들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으나,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이 변해 나온 어떤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경제학 분야도 유사한 특성을 드러낸다. <<경제학의 빈곤>>에서 독립 경제학자 로버트 커트너는 이 학계의 순응주의와 비적실성irrelevance을 비판한다. 경제학자들이 점점 더 복잡한 수리 모형을 도입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을 조명해주어서가 아니라 출판을 용이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모형들은 경제학들이 새로운 정보를 축적하지 않고도서도 눈문을 쓸 수 있게 해준다. (229쪽)

 

어쩌면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상아탑에 갇힌 지식인들, 아니 이젠 그냥 대학교수로만 불려져야 할 전문가들은 현실 세계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예전과 비교해 부유졌으나, 지적으로 빈곤해졌다. 그들의 지적 무능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전문가처럼 보이기 위해 학술 논문 형태로 학술지에만 글을 싣는다. 

 

전통적 지식인의 서식지에 일어나는 변화는 즉각적이지 않다. 이는 도시의 쇠퇴, 교외의 성장, 대학의 팽창과 나란히 진행된다. 패스트푸드점이 싸구려 식당을 퇴출시키거나, 자동판매기가 신문 가판대를 몰아내거나, 캠퍼스 녹지가 훼손된 도시공원을 대신할 때 문명의 붕괴를 선언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생활의 리듬에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할 이유도 없다. 사람들이 도시의 거리에서 성장하느냐, 교외의 쇼핑몰에서 성장하느냐는 중요하다. 지식인이 목을 매는 상대가 자신의 원고를 검토하는 편집자 한 명이냐, "심사위원" 세 명과 동료 열 명과 위원회 몇 군대와 학장 여럿이냐는 중요하다. 

대학은 어떤 정해진 지적 형태를 권장한다. 거기에 맞출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사람은 그냥 채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서전의 달인이라는 비난을 받곤 했던 <타임> 매거진 제국의 헨리 루스도 이단아와 반골들을 채용했고 좋아하기까지 했다. 한편 대학의 채용은 위원회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학위, 증빙서류, 적절한 경의, 싹싹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위원회가 학과에 추천하고 학과는 학과장에게 조언하고 학과장은 학장에게 충고하고 학장은 대학 총장에게 제안하는 시스템에서 위원회를 내 편으로 만들려면 일개인의 찬동을 얻어내는 능력과는 사뭇 다른 재능이 필요하다. (319쪽 ~320쪽) 

 

미국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담은 이 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원고료와 강연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지식인에게 대학 사회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왜 대학으로만 들어가면 조용해지는지, 고분고분해지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책에선 대학에서 쫓겨난 몇몇 지식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학이 원하는 형태는 정해져 있다. 그러니 대학 사회와 지식인 사회를 공존하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젠 예전만큼 글을 실을 수 있는 저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생계를 유지할 만큼의 충분한 고료를 줄 수 있는 곳도 거의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패턴도 많이 달라져서 주간의 활동이 끝나면 자동차를 운전해 교외에 위치한 집으로 간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나 예술가들이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흔하지 않은 일상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의 교외의 성장은 상당히 치명적인 구석이 있는데, 그것은 대중교통 수단의 쇠퇴를 불러온 것 뿐만 아니라 가난한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커뮤니티까지 변화시켰다. 나는 왜 미국의 대중 교통 시스템이 형편없을까 하고 궁금했는데, 그것은 이미 1950년대부터 시작된 교외 단독 주택 단지의 건설과 연계된 것이었다.

 

미국 사회의 지식인 문제에 대한 책은 상당히 많다. 이는 좌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나는 여러 차례 현실 사회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르는 대학 교수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이 몸 담은 분야 이외엔 관심 없는 직장인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니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저널에 다양한 주제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역량은 없지만,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에 대해서만 아는 전문가였던 셈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철학과 교수는 비트겐슈타인만 알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니 대부분의 철학과 교수들이 대학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 이미 철학은 현실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히 시사적이다. 출간된지 이십 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