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이론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지하련 2022. 10. 2. 15:48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지음), 안규남(옮김), 동녘, 2013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뒤늦게 읽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2013년에 번역되었으니, 이 무렵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그 동안 나는 이 문제,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언제나 쫓기듯 살아왔다. 어쩌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럴 것이다. 저 거대한 외부 세계가 어떻게 변해가는가에 이해가 점차 옅어지고, 관심 마저도 둔해져 하루하루, 혹은 한주한주 벌어지는 회사 일에 치여 멍청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저 세계에서의 사소한 변화가 우리 개개인이 살아가는 이 작고 소중한 일상에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이 책이 씌여진 목적도 그러할 테니.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은 미국 내 시장을 타겟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서야 자신들의 정책이 가져올 영향이 세계적임을 알 것이며, 그것으로 기대하는 바도 분명할 것이다. 이에 맞추어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금리 인상을 하고 있으나, 부채가 많았던 몇몇 나라들은 이미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빠져 들었으며(경제적 불평등은 각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국가들 차원에서도 동일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도 가난한 나라에 돈을 빌려주고 그 곳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돈을 못 갚으면 해당 인프라의 사용권을 가져오는 식이니, 겉은 번드러하지만 실제는 상당히 영악하고 잔인한 수단이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정치적 질서까지 바꾸어 놓을 태세다.

(경제학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그냥 단순하게 나는 금융경제가 왜 실물경제를 흔들게 만드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화폐의 현재 가치'라는 표현 자체가 애초부터 잘못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이자'는 건 애초에 불경한 것이며 종교에서도 금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상당히 어렵게 만들어 이젠 전문가들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복잡해졌다. 이것의 시작도 실물경제에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실물경제의 훼방꾼이 되었으니. 어쩌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탓에 내가 돈을 못 벌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상황은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져 온 현상일 게다. 언제 평등했던 시절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불평등했다고 모두 불행했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음을 기억하자. 또한 불평등이 예견되고 반복되는 것에 속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못된 정책의 설계와 수립, 실행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책들을 읽다보면, 이것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젠 너무 상황이 심각해져서 너무 많은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결해야만 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게 된다. 즉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문제의 배경과 원인부터 먼저 따져 물어야 하며, 이 책 또한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으며, 실제 심각한 불평등의 상황에 놓인 이들은 이런 책 따윈 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책을 읽을 상황에 있지도 못하고, 이런 책들이 있는지 조차 모를 것이며, 이런 책을 읽으라고 해도 읽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왜 내가 가난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해 그 어떤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 그것은 집안 환경의 불우함, 혹은 자신의 나약함이나 불성실함 탓이 아니라 이 세계가 글러먹은 탓임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이것을 이야기하여도 믿지 않을 지경이니, 어쩌면 이 세계는 탐욕꾼(부자)과 비열한 사기꾼(정치가), 삐딱하고 옹졸한 먹물들(지식인들)의 아수라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가난한 데다 미래도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천적이며 자신감과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 강철 체력을 갖춘 겁 없는 등반가라도 건널 수 없을 만큼 이미 깊은 심연이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그 자체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10쪽 ~ 11쪽)

 

이제 저 심연은 가난하지만 낙천적이고 자신감과 활력이 넘쳤던 이들까지도 집어삼키고 있다. 심지어 부유한 이들조차 까닭없이 불행하다고 여기며 세상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 탐욕스럽게 부에 집착하게 만든다. 실제 다양한 조사 및 통계 결과 부자들마저 위태롭게 하는 것이 바로 저 깊은 심연이다. 저 심연, 돌이킬 수 없는 경제적 불평등 말이다. 

 

최근의 변화가 초래한 진정한 영향 즉 ‘중산 계급들’의 ‘프리카리아트’로의 전락이라는 결과. (21쪽)

*프리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한precarious과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를 합성한 조어로 불안정한 고용, 노동 상황에 놓인 비정규직, 파견직, 실업자, 노숙자들을 총칭한다.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등장한 신노동자 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2003년에 이탈리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는 몇 명의 저자를 집중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그 중 한 명이 대니얼(대니) 돌링이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출간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양극화되면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에 점점 더 많이 상상하기 시작한다. - 대니얼 돌링 (27쪽)

 

대니얼 돌링은 경제적 불평등이 지리적 분리, 또는 경계를 만들게 되고(한국의 경우 강남과 비강남의 구분이나 한남동이나 성북동, 평창동 등의 부자 동네가 될 것이다), 그 경계를 넘어 다니는 건 오직 서로의 상상일 뿐, 절대 만날 일 이 생기지 않으므로 일상에서의 어떤 공감대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각자의 영역 속에서 각자 나름대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극한의 경쟁을 수행하게 된다.  

 

랜슬리는 ‘임금 몫이 줄어들면서 개인 소비에 과하게 의존하는 경제들의 수요가 감소한 탓에 소비자 사회들은 소비 능력을 잃고 있고 소수의 세계적 금융 엘리트의 손에 집중된 성장 수익은 자산 버블을 초래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의 결론은 사회적 불평등의 냉혹한 현실은 사회 내의 모든 사람에게, 혹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나쁘다는 것이다. (28쪽)

 

금융 버블은 실물 경제를 위축시킨다. 급여는 정체되고 소비는 마치 주술처럼 우리를 감싸고 돌아, 나중에는 빚을 내어 소비를 하게 된다. 그건 일상의 필요가 아니라 무너지는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다(왜 카푸어가 되는지, 하우스푸어가 되는지 묻지 마라). 

 

오늘날 전 세계의 최고 부자 10명이 총 2조 7000억 달러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 5위 경제 대국인 프랑스의 경제 규모와 거의 같다. (57쪽)

 

이 기괴한 불평등은 원래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다. 갑작스레 심해진 것이다. 

 

‘경제 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현대 경제 이론은 순수 시장들이 더 광범위한 경제에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하지만 역(逆)인센티브는 은행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세계 경제에 마구 신용을 공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로 인해 금융업자들의 부는 늘어났지만, 그것은 ‘실물경제’를 질식시키는 활동의 확대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다. (…) 기업 인수, 사모펀드, 부동산, 다양한 형태의 투기 활동, 금융공학과 산업공학 등에 쏟아 부은 돈은 재산 축적으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부나 기업 또는 일자리의 신규 창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로 기존에 있는 것들의 이전에 의한 것이었다.” - 스튜어트 랜슬리 (65쪽)

 

사람들은 언론에서 기사화하여 이야기하는 것, 혹은 정치인이나 대학교수, 전문가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실은 앞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면 좌파가 아니냐고 말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따위는 개나 줘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한 두 개의 성공 사례로 수백개의 실패 사례를 덮는 것이 자본주의이며 현대의 미디어가 만들어가는 세계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서는 강요된 선택지들이 아닌 자신이 직접 선택지를 만들어야 하지만, 그건 정말 너무 어려운 일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는 상점들을 자신의 삶과 삶 일반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과 고통을 치유하거나 완화시켜줄 약들로 가득 찬 약국으로 생각하도록 훈련받는다. 그리하여 상점과 쇼핑은 실로 완전히 종말론적 차원을 획득한다. 사회학자 조지 리처George Ritzer의 명언처럼, 슈퍼마켓은 우리의 사원寺院이다.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쇼핑 목록은 우리의 ‘성무일도서’이고 쇼핑몰을 거니는 것은 우리의 순례가 된다. 충동구매와 보다 매력적인 물건들로 바꾸기 위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처부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가장 열광시키는 감정이다. 소비의 즐거움의 충만은 삶의 충만을 의미한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쇼핑할 것인가 쇼핑하지 않을 것인가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78쪽) 

 

경제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책 대부분이 상당히 우울한 결론을 이야기한다. 분명한 해결책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면 적어도 최근 십여년 전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엘리아스 카네티를 언급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다. 엘리아스 카네티도 그 명성에 비하면 한국에선 거의 읽히지 않은 작가가 되었으니...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말의 양심Das Gewissen der Worte>>, 이 책은 카네티가 1976년 1월 뮌헨에서 작가들을 상대로 행한 연설로 끝을 맺는다. 이 연설에서 그는 현재와 같은 세계 상황에서 ‘작가나 지금까지 작가라고 간주된 사람들이 쓸모있는 영역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작가의 1939년 8월 23일의 진술로 논의를 시작한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112쪽)

 

작가나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사명이 어디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비판적 지식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내던 시기는 지나간 듯 싶다. 한국은 아예 그런 게 있는가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짧고 간결하다. 메시지도 분명하며 금방 읽을 수 있지만, 그 충격은 상당하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몇 권의 책들을 알게 되었다. 대니얼 돌링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학자였다. 

 

자유시장 경제학을 정당화하는 기본적인 도덕적 주장 가운데 하나, 즉 개인의 이윤 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의혹에 싸였고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11쪽) 

 

이제 우리가 배우는 경제학에 대해서도 다시 재고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 위에서 언급한 스튜어드 랜슬리는 이 지점을 이야기한다. 돌링의 경우 주류경제학에 대해 경멸적으로 비난한다. 당연한 것은 없고 다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경제적 불평등은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 정신적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아마 이 책은 그 이해의 시작으로 제법 단단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이미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을 여러 권 읽은 바 있다. 아래는 최근에 읽은 책들 목록이다.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책들을 정리해서 올려야겠다. 알게 모르게 책이 많이 나와있다. 

 

 

앵거스 디턴, <<위대한 탈출>>, 최윤희, 이현정(옮김), 한국경제신문 

리처드 윌킨스, 케이트 피킷, <<평등이 답이다 The Spirit Level>>, 전재웅(옮김), 이후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옮김), 와이즈배리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1925~2017)